인스타 팔로워 [전중환의 진화의 창]우주에는 목적이 없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행복한 댓글 0건 조회 8회 작성일 24-05-11 01:21본문
인스타 팔로워 가끔 이런 기분이 든다. 우주에 웅대한 목적이 있고, 모든 일은 다 이유가 있어서 일어난다는 느낌 말이다.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도 돌이켜보면 퍼즐처럼 맞춰지는 지난 삶의 행로에 이따금 경외감을 품게 된다. 이를테면, 애인에게 차인 덕분에 오히려 평생의 배필을 만난다. 대학을 재수하는 바람에 내 적성에 맞는 천직을 찾는다. 장대비를 피하려고 우연히 들어간 서점에서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책을 집어 든다.
숙명, 섭리, 계시, 업보, 인연, 우주적 질서 등 뭐라 불러도 좋다. 우주는 목적으로 충만하고, 내 삶은 그 높은 계획의 작은 일부라고 생각하면 왠지 안도감이 든다. 내 인생이 비로소 의미를 띤다고 여긴다. 병원 벽에 걸린 인체 해부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놀랄 정도로 복잡한 생명의 신비는 온 우주가 의도를 지닌 행위자의 작품이야!라고 열렬히 증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이토록 완벽한 설계가 무에서 그냥 저절로 생겨났겠는가? 어떤 높은 힘이 이 세상을 인도하고 있음이 분명하지 않은가?
아니다. 우주에는 목적이 없다. 이 깨달음은 과학 혁명이 인류에게 건넨 빛나는 횃불이었다. 갈릴레이, 뉴턴, 라플라스는 우주가 인간의 바람과 상관없이 그저 운행할 따름임을 일깨웠다. 찰스 다윈은 생명의 ‘설계’가 맹목적인 시행착오를 통해 서서히 진화했음을 일깨웠다.
생물을 공부하면 할수록 우주는 인간에 무관심함을 알 수 있다. 포식자와 병원체는 매 순간 우리를 잡아먹으려 한다. 해충과 부패 미생물은 호시탐탐 우리의 음식을 훔쳐 먹으려 한다. 모든 생명체는 과거의 환경에서 유전자를 잘 퍼뜨리게끔 자연 선택에 의해 ‘설계되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전 인류를 불행에 빠뜨렸지만, 그건 코로나19가 알 바 아니다.
우주에 어떤 목적이 내재해 있다면, 왜 이 세상에 코로나19 팬데믹, 소아암, 대지진,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같은 악과 고통이 끊이지 않는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사실, 이 문제는 다윈이 신앙심을 잃게 만든 문제이기도 했다. <종의 기원>을 출간한 지 여섯 달 후, 다윈은 한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자애롭고 전능하신 신께서 살아 있는 애벌레의 몸을 먹고 살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지닌 맵시벌을 일부러 창조하셨으리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렵습니다.
맵시벌 어미는 다른 곤충의 몸 안에 알을 낳는다. 여기서 부화한 유충들은 숙주를 파먹으면서 자라게 된다. 어미는 알을 낳기 전에 숙주의 신경절 하나하나에 정성스럽게 침을 놓는다. 숙주가 바로 죽지 않고 계속 살아 있게 해서, 나중에 태어날 자식들이 인스타 팔로워 늘 신선한 고기를 먹게 하기 위함이다. 자식들도 어미 못지않다. 숙주의 신체 기관을 정해진 순서에 따라 먹는다. 지방과 내장을 먼저 먹는다. 심장처럼 중요한 부위는 맨 마지막에 먹는다. 숙주를 오래 살려 두어야 하니까 말이다.
참으로 잔인하다. 그러나 우주는 잔인하지도 친절하지도 않다. 선의도 악의도 없다. 우주는 단지 무관심하고 냉담할 뿐이다. 유전자가 다음 세대에 전달되는 한, 생명체가 고통을 당하건 쾌락에 빠지건 우주는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저서 <에덴의 강>에서 이렇게 말했다. DNA는 인스타 팔로워 살피지도 않고 알지도 못한다. DNA는 그냥 있다. 그리고 우리는 DNA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뭔가 허전하다. 우주에는 목적도 의미도 없다고 과학자들이 방정맞게 떠든다는 건 알겠다. 그래도 신이 있건 없건, 우리네 팍팍한 삶은 이 세상엔 원대한 계획이 있다는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을까? 목적이 있다는 믿음에서 그나마 위안을 얻는 사람들을 박절하게 대할 건 없지 않나?
편가르기의 심리학
왜 상상의 세계에 빠질까
왜 음모론을 퍼뜨리려 애쓸까
도킨스는 이러한 위로 논증은 오류임을 지적한다. 우주에는 목적이 있다. 만약 목적이 없다면 삶은 공허하고 황량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논리가 맞다면, 방금 죽은 우리 집 개는 살아 있다. 만약 우리 집 개가 없다면 삶은 공허하고 황량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어떤 믿음이 위로를 준다고 해서 그것이 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누군가가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고, 우리가 넘어지면 욕받이가 되어줄 것이라는 기대에는 다소 응석이 섞여 있다. 진정 어른스러운 태도는, 내 삶은 내가 선택한 만큼 의미 있다고 보는 것이다. 죽음보다는 삶이 더 낫고, 궁핍보다는 풍요가 더 낫고, 억압보다는 자유가 더 낫고, 불행보다는 행복이 더 낫다. 목적이 없는 우주를 사는 당신은 당신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삶을 온전히 살아낼 용기가 있다.
국민연금 개혁안의 21대 국회 임기 내 처리가 7일 결국 불발됐다. 여야가 내는 돈(보험료율)은 4%포인트를 더 올리기로 조율하고도 받는 돈(소득대체율)은 2%포인트 차이를 두고 합의하지 못한 것이다. 주호영 연금특위 위원장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사실상 21대 활동을 종료하게 되는 상황이 왔다고 밝혔다. 22대 국회에서 다시 논의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국회 임기가 아직 3주 이상 남아 있는데 서둘러 특위 활동 종료를 선언한 것은 너무 무책임하다. 그동안 뭘 하다 이제 와서 다음 국회로 미루겠다는 것인가.
연금개혁 합의 불발은 ‘더 내고 더 받는’ 안과 ‘더 내고 그대로 받는’ 안의 간극을 좁히지 못한 데 있다. 지난달 22일 공론화조사위는 시민대표단의 투표 결과를 토대로 ‘더 내고 더 받는’ 다수안을 연금특위에 보고했다. 보험료율을 9%→13%로, 소득대체율을 40%→50%로 올리는 안이다. 이와 달리 내는 돈을 12%로 올리고 받는 돈은 지금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소수안이다. 최종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여야는 치열한 공방을 벌여왔다. 더불어민주당은 소득대체율을 높인 다수안을 지지하고, 국민의힘은 개악 포퓰리즘이라며 맞섰다. 최종적으로 보험료율을 13%로 올리는 데까지는 의견을 모았지만, 소득대체율(더불어민주당 45%, 국민의힘 43%)은 끝까지 합의점을 찾지 못해 ‘빈손’으로 활동을 종료하게 된 것이다.
국가적 현안인 연금개혁은 늦어질수록 난제인 ‘시간과의 싸움’ 성격이 크다. 국회가 2022년 연금특위를 꾸리고, 정치적인 부담에 시간만 질질 끌다 활동기한을 두 차례나 연장하면서도 결론을 내지 못한 것은 ‘폭탄 돌리기’로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21대 국회의 연금특위가 이대로 활동을 끝내면, 22대 국회에서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마지막 매듭을 풀지 못한 실타래를 다시 새 국회에 넘기는 꼴이다.
연금개혁이 늦어지면서 국민연금의 기금 고갈 시점은 2055년으로 달라진 게 없다. 국민연금 보험료율은 1998년 9%로 올린 이후 26년째 손을 대지 못했다. 지속 가능한 연금 체계를 마련하기 위한 개혁은 불가피하다. 소득보장·재정안정을 놓고 합리적인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여야가 주장한 소득대체율 비율 격차는 크지 않으니 얼마든지 절충안을 마련하고 국민과 소통할 수 있다. 여야는 머리를 맞대고 21대 국회에서 연금개혁을 끝내기 바란다.
숙명, 섭리, 계시, 업보, 인연, 우주적 질서 등 뭐라 불러도 좋다. 우주는 목적으로 충만하고, 내 삶은 그 높은 계획의 작은 일부라고 생각하면 왠지 안도감이 든다. 내 인생이 비로소 의미를 띤다고 여긴다. 병원 벽에 걸린 인체 해부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놀랄 정도로 복잡한 생명의 신비는 온 우주가 의도를 지닌 행위자의 작품이야!라고 열렬히 증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이토록 완벽한 설계가 무에서 그냥 저절로 생겨났겠는가? 어떤 높은 힘이 이 세상을 인도하고 있음이 분명하지 않은가?
아니다. 우주에는 목적이 없다. 이 깨달음은 과학 혁명이 인류에게 건넨 빛나는 횃불이었다. 갈릴레이, 뉴턴, 라플라스는 우주가 인간의 바람과 상관없이 그저 운행할 따름임을 일깨웠다. 찰스 다윈은 생명의 ‘설계’가 맹목적인 시행착오를 통해 서서히 진화했음을 일깨웠다.
생물을 공부하면 할수록 우주는 인간에 무관심함을 알 수 있다. 포식자와 병원체는 매 순간 우리를 잡아먹으려 한다. 해충과 부패 미생물은 호시탐탐 우리의 음식을 훔쳐 먹으려 한다. 모든 생명체는 과거의 환경에서 유전자를 잘 퍼뜨리게끔 자연 선택에 의해 ‘설계되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전 인류를 불행에 빠뜨렸지만, 그건 코로나19가 알 바 아니다.
우주에 어떤 목적이 내재해 있다면, 왜 이 세상에 코로나19 팬데믹, 소아암, 대지진,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같은 악과 고통이 끊이지 않는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사실, 이 문제는 다윈이 신앙심을 잃게 만든 문제이기도 했다. <종의 기원>을 출간한 지 여섯 달 후, 다윈은 한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자애롭고 전능하신 신께서 살아 있는 애벌레의 몸을 먹고 살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지닌 맵시벌을 일부러 창조하셨으리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렵습니다.
맵시벌 어미는 다른 곤충의 몸 안에 알을 낳는다. 여기서 부화한 유충들은 숙주를 파먹으면서 자라게 된다. 어미는 알을 낳기 전에 숙주의 신경절 하나하나에 정성스럽게 침을 놓는다. 숙주가 바로 죽지 않고 계속 살아 있게 해서, 나중에 태어날 자식들이 인스타 팔로워 늘 신선한 고기를 먹게 하기 위함이다. 자식들도 어미 못지않다. 숙주의 신체 기관을 정해진 순서에 따라 먹는다. 지방과 내장을 먼저 먹는다. 심장처럼 중요한 부위는 맨 마지막에 먹는다. 숙주를 오래 살려 두어야 하니까 말이다.
참으로 잔인하다. 그러나 우주는 잔인하지도 친절하지도 않다. 선의도 악의도 없다. 우주는 단지 무관심하고 냉담할 뿐이다. 유전자가 다음 세대에 전달되는 한, 생명체가 고통을 당하건 쾌락에 빠지건 우주는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저서 <에덴의 강>에서 이렇게 말했다. DNA는 인스타 팔로워 살피지도 않고 알지도 못한다. DNA는 그냥 있다. 그리고 우리는 DNA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뭔가 허전하다. 우주에는 목적도 의미도 없다고 과학자들이 방정맞게 떠든다는 건 알겠다. 그래도 신이 있건 없건, 우리네 팍팍한 삶은 이 세상엔 원대한 계획이 있다는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을까? 목적이 있다는 믿음에서 그나마 위안을 얻는 사람들을 박절하게 대할 건 없지 않나?
편가르기의 심리학
왜 상상의 세계에 빠질까
왜 음모론을 퍼뜨리려 애쓸까
도킨스는 이러한 위로 논증은 오류임을 지적한다. 우주에는 목적이 있다. 만약 목적이 없다면 삶은 공허하고 황량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논리가 맞다면, 방금 죽은 우리 집 개는 살아 있다. 만약 우리 집 개가 없다면 삶은 공허하고 황량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어떤 믿음이 위로를 준다고 해서 그것이 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누군가가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고, 우리가 넘어지면 욕받이가 되어줄 것이라는 기대에는 다소 응석이 섞여 있다. 진정 어른스러운 태도는, 내 삶은 내가 선택한 만큼 의미 있다고 보는 것이다. 죽음보다는 삶이 더 낫고, 궁핍보다는 풍요가 더 낫고, 억압보다는 자유가 더 낫고, 불행보다는 행복이 더 낫다. 목적이 없는 우주를 사는 당신은 당신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삶을 온전히 살아낼 용기가 있다.
국민연금 개혁안의 21대 국회 임기 내 처리가 7일 결국 불발됐다. 여야가 내는 돈(보험료율)은 4%포인트를 더 올리기로 조율하고도 받는 돈(소득대체율)은 2%포인트 차이를 두고 합의하지 못한 것이다. 주호영 연금특위 위원장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사실상 21대 활동을 종료하게 되는 상황이 왔다고 밝혔다. 22대 국회에서 다시 논의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국회 임기가 아직 3주 이상 남아 있는데 서둘러 특위 활동 종료를 선언한 것은 너무 무책임하다. 그동안 뭘 하다 이제 와서 다음 국회로 미루겠다는 것인가.
연금개혁 합의 불발은 ‘더 내고 더 받는’ 안과 ‘더 내고 그대로 받는’ 안의 간극을 좁히지 못한 데 있다. 지난달 22일 공론화조사위는 시민대표단의 투표 결과를 토대로 ‘더 내고 더 받는’ 다수안을 연금특위에 보고했다. 보험료율을 9%→13%로, 소득대체율을 40%→50%로 올리는 안이다. 이와 달리 내는 돈을 12%로 올리고 받는 돈은 지금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소수안이다. 최종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여야는 치열한 공방을 벌여왔다. 더불어민주당은 소득대체율을 높인 다수안을 지지하고, 국민의힘은 개악 포퓰리즘이라며 맞섰다. 최종적으로 보험료율을 13%로 올리는 데까지는 의견을 모았지만, 소득대체율(더불어민주당 45%, 국민의힘 43%)은 끝까지 합의점을 찾지 못해 ‘빈손’으로 활동을 종료하게 된 것이다.
국가적 현안인 연금개혁은 늦어질수록 난제인 ‘시간과의 싸움’ 성격이 크다. 국회가 2022년 연금특위를 꾸리고, 정치적인 부담에 시간만 질질 끌다 활동기한을 두 차례나 연장하면서도 결론을 내지 못한 것은 ‘폭탄 돌리기’로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21대 국회의 연금특위가 이대로 활동을 끝내면, 22대 국회에서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마지막 매듭을 풀지 못한 실타래를 다시 새 국회에 넘기는 꼴이다.
연금개혁이 늦어지면서 국민연금의 기금 고갈 시점은 2055년으로 달라진 게 없다. 국민연금 보험료율은 1998년 9%로 올린 이후 26년째 손을 대지 못했다. 지속 가능한 연금 체계를 마련하기 위한 개혁은 불가피하다. 소득보장·재정안정을 놓고 합리적인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여야가 주장한 소득대체율 비율 격차는 크지 않으니 얼마든지 절충안을 마련하고 국민과 소통할 수 있다. 여야는 머리를 맞대고 21대 국회에서 연금개혁을 끝내기 바란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