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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제한 계좌 하루 이체·ATM 거래한도 30만원→10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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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행복한 댓글 0건 조회 21회 작성일 24-05-04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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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주부 A씨는 금융거래 목적 확인을 위한 증빙서류를 갖추지 못해 은행에서 일반 계좌를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대신 이용한 것이 일일 이체한도가 낮은 ‘한도제한 계좌’였다. 한동안 큰 불편을 못 느꼈던 A씨가 거래에 불만이 생긴 건 지난해 아들이 대학 진학과 함께 자취 생활을 하면서다. 매달 월세를 보내줘야 하는데, 한도제한 계좌의 ‘하루 30만원’ 이체 한도 탓에 며칠씩 나눠 송금해야만 했다.
2일부터 한도제한 계좌의 인터넷뱅킹 및 현금자동인출기(ATM) 거래한도가 하루 30만원에서 100만원으로 높아진다. 기존의 이체한도가 경제 규모에 비해 너무 적고, 한도를 푸는 데에도 오래 걸린다는 이용자 불만에 따른 것이다.
2016년부터 은행은 계좌 개설시 거래 목적을 확인한다. 급여나 공과금 이체 등 거래 목적이 뚜렷해야만 일반계좌를 개설할 수 있다. 대포통장을 근절하기 위해 도입된 것으로, 증빙 서류를 제출하기 어려운 이용자들에게는 ‘한도제한 계좌’를 대신 이용할 수 인스타 한국인 팔로워 있도록 했다. 1일 금융거래(이체・출금) 한도는 인터넷뱅킹 30만원, ATM 30만원, 창구거래 100만원이었다. 하지만 이체한도가 낮아 이용자들 불만이 생겼고, 이에 국무조정실 규제심판부는 지난해 8월 금융당국에 규제 합리화를 권고했다.
이에 금융위원회는 한도제한 계좌의 하루 이체 및 ATM 거래한도를 각각 100만원으로 상향키로 했다. 기존 100만원이었던 창구거래 한도는 300만원으로 높아진다. 상향 한도는 고객이 별도로 신청할 필요 없이 기존의 한도제한 계좌에도 적용된다.
금융당국은 이체한도가 커지면서 대포통장이 다시 기승을 부릴 수 있다는 우려를 고려해, 사기이용 계좌에 대한 제재는 강화하기로 했다. 사기이용 계좌로 사용된 통장은 지급정지가 해제된 후에도 해당 통장의 인출·이체한도가 기존 금융거래 한도(인터넷뱅킹 30만원·ATM 30만원·창구거래 100만원)로 축소된다.
이와 함께 은행 창구 및 인터넷 홈페이지 등에서 안내장을 통해 금융거래에 필요한 증빙서류를 안내받을 수 있게 된다. 기존에는 증빙서류가 무엇인지 사전에 알 수가 없어 은행을 여러 번 방문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컸는데, 이런 불편을 방지하기 위해 사전에 안내한다는 의미다.
134주년 세계 노동절을 맞은 1일 양대 노총이 서울 도심 곳곳에서 집회를 열고 윤석열 정부의 노동정책은 반노동 악행이라고 규탄했다. 민주노총은 이날 오후 2시 서울 중구 세종대로에서 ‘2024 세계 노동절 대회’를 열었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부터 이주노동자, 소방구급대원 등 다양한 직종의 노동자들이 모였다.
주최 측 추산 2만5000여명이 세종대로 사거리 동화면세점 앞부터 지하철 1호선 시청역 1번 출구까지 약 600m 구간 4개 차로를 가득 메웠다.
집회 군중은 ‘단결’이라고 적힌 빨간색 띠를 묶은 오른팔로 팔뚝질을 하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했다. 그리고 ‘모든 노동자의 노동권을 보장하라’고 적힌 손팻말을 손에 들고 윤석열 정권 끌어내리자 인간답게 살고 싶다, 최저임금 쟁취하자고 외쳤다.
민주노총은 윤 대통령이 노조법 2·3조 개정안에 대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한 것을 비판하며 노조법과 근로기준법 개정을 촉구했다.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은 민심을 외면한 정권은 민중의 준엄한 심판을 받았지만 윤석열 정권은 반성하지 않았다며 우리의 삶을 바꾸기 위해선 누구나 노동조합을 할 수 있도록 손해배상과 가압류로 위협받지 않도록 노조법을 개정해야 하고 일하는 사람 누구나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근로기준법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
참가자들은 모두의 노동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외쳤다. 신수연 서비스연맹 특성화고노조 경기지부장은 실습생과 고졸 노동자들은 죽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며 특성화고 현장 실습생도 노조법을 적용받고 안전하게 일할 수 인스타 한국인 팔로워 있도록 목소리 내고 싶다고 했다.
네팔 출신 농촌 이주노동자 암릿 림부는 정부는 이주노동자 숫자는 늘리고 권리는 줄이면서 최저임금 차등지급을 시도하고 있다며 차별 없는 노동권이 보장되도록 대회에 참가했다고 말했다.
같은 시각 한국노총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했다.
주최 측 추산 8000여명은 최저임금 차등 적용 시도 중단과 노조법 2·3조 재개정을 촉구했다.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은 윤석열 정부가 남은 임기 3년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민심을 받들어 반노동 정책을 포기하고 국정기조를 대전환하는 것뿐이라며 윤석열 대통령이 공언한 바 있는 최저임금 차별 적용 시도를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앞서 건설노조 등 민주노총 산하 5개 노조는 사전대회를 진행하고 본대회에 합류했다.
지난해 노동절에 분신한 건설노조 간부 양회동씨 1주기를 맞은 건설노조는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사전대회를 열고 노조탄압 분쇄하고 노동자 생존권 사수하자고 외쳤다. 경찰청 앞을 가득 메운 대열 중 맨 앞에 앉은 양씨의 형 양회선씨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조합원들의 구호 소리를 들었다.
양씨는 노동자도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달라는 것이 죽음의 고통을 불사한 동생의 마지막 외침이었다면서 함께 싸워 노동 탄압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고 말했다.
2011년 여름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에서 홍세화를 봤다. 고공농성을 하던 김진숙을 응원하는 희망버스가 갔을 때다. 홍세화는 무대 먼발치 담벼락 쪽에서 홀로 행사를 지켜봤다. ‘진보 셀럽’들이 맨 앞자리 어디 앉을지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던 걸 목격한 뒤라 그 모습이 오래 남았다.
2013년 홍세화가 제안해 만든 학습 협동조합 이름이 ‘가장자리’라는 걸 알았을 때 경계를 지키거나 버티려던 마음으로 담벼락 쪽에 선 건 아닐까 생각했다. ‘가장자리’ 창립과 ‘말과활’ 창간을 두고 인터뷰했을 때 홍세화는 이렇게 말했다. 삶의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 벼랑 끝에 내몰리는 사람들이 함께하는 것이죠. 중심을 지향하는 게 아닙니다. 중심이 점 하나라면, 가장자리는 평등한 점들이 모여 만드는 선입니다. 벼랑 끝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맞잡는 연대의 선인 거죠.
부고에 그 가장자리를 떠올렸다. 그 자리는 전장이었다. 모두가 점 하나, 장교가 되려는 세상에서 홍세화는 늘 끝까지 사병으로 남겠어 시어질 때까지 수염 풀풀 날리는 척탄병이고 싶다고 했다. 척박한 땅에서 사랑하고, 참여하고 연대하고 싸워 작은 열매라도 맺게 하는 거름 역할을 하려 했다.
끝까지 ‘한국 사회 부적응자’로 남았다. 프랑스에서 귀국한 해 어느 라디오 인터뷰에서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하고 계신가요’라는 진행자 질문에 적응해야 하나요라고 반문했다. 홍세화는 불온성을 간직한 걸 또 다행으로 여기고 살며 악역을 자처했다. 불화, 비난을 감당하며 가장자리를 지켰다.
‘통치 권력이나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맞선’ 이 불온한 자는 거침없었다. 척탄병으로 폭탄을 던진 곳은 수구보수 자리만이 아니었다. 이른바 ‘진보좌파’ 진영에도 투척했다. 홍세화는 세상을 바꾼다면서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기 전에 스스로 바뀐다는 사실을 상기하려 했다. 조국의 사모펀드 문제와 우리는 조국이다 집회의 실상을 비판한 것도,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노동문제에 분노하던 이들이 문재인 정권의 노동문제에 침묵할 때 나는 김용균이라고 외친 것도 늘 가장자리를 지키며 싸운, 늙었으나 용맹했던 척탄병의 일이관지였다.
수구보수 쪽 사람들은 홍세화가 죽고 ‘진보좌파 비판’을 끄집어내지만, 그는 수구보수의 반동성을 줄곧 비판한 사람이다. 이 정권이 들어서자 윤석열의 ‘독불장군식 밀어붙이기’와 ‘김건희에는 눈감는 불공정’ 등을 비판했다. 홍세화는 ‘진보좌파’의 우경화와 이중성, 부의 축적을 비판했지 수구보수를 옹호하지 않았다. 2022년 11월 쓴 한겨레 칼럼에는 <조선일보> 따위가 문재인 정권을 ‘좌파정권’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우리가 왜 진보냐? 좌파냐?’라고 응수하지 않는다고 썼다.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수구 언론이 우경화된 ‘진보좌파’ 세력을 ‘좌파’로 부르는 것을 좌파에 대한 모독으로 여겼다.
자기 좌표도, 공격 대상 좌표도 한결같았다. 소수자, 난민, 여성, 장애인, 비정규직 노동자, 빈자 즉 육체적 품이든, 정신적 품이든 품을 팔아야 먹고살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약자들 편에서 싸웠다. 벌금 수십만원, 인스타 한국인 팔로워 100만~200만원이 없어 교도소로 가 노역해야 하는 이들을 위해 맡은, 스톡옵션도 수당도 없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은행장(장발장은행)’도 그에겐 마땅한 자리였다.
‘저널리스트 홍세화’도 20 대 80 사회에서 80의 생존과 투쟁 이야기를 거듭 끄집어내며 대물림되는 가난을 직시했다. 마지막 단독 저서 <결 : 거칢에 대하여>(2020, 한겨레출판)에서 언론이 다루는 서사는 연예인·부자·유명인·호감정치인 등 ‘20’과 관련된 것들이고, 노동자 등 ‘80’과 관련된 서사는 사회면에 양념처럼 곁들여지는 점도 지적했다.
지금이 사과 타령이나 할 때인가
윤 대통령, 이대로면 더한 게 온다
심판의 날, 그 이후
‘공화주의자 홍세화’는 한겨레21과 진행한 마지막 인터뷰에서 비판성·연대성을 공화국에서 품어야 하는 민주시민의 성격이라고 했다. 현실은 어떤가. 자기 진영·정파 사람들 잘못에는 눈감거나 옹호하고, 다른 진영·정파 잘못은 침소봉대한다. 진보와 개혁을 외치는 이들 중 난민, 소수자와 연대하는 이도 찾기 힘들다. 공공의 장은 비판적 이성과 토론 대신 광신과 맹신, 적의로 차버렸다. 홍세화는 ‘대한민국’이 국가 귀족, 사회 귀족 나라였지 공화국인 적이 없다고도 했다.
홍세화가 죽었다. 진보를 자처하거나, 진보 운동을 해온 이들이 진영·정파의 치어리더가 되고, 정론을 추구한다는 이들이 ‘20의 이야기꾼’ 노릇만 하는 세상에서 그의 부재를 오래 되새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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