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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의 위대한 이웃]‘오늘도 함께 기도하는’ 강영희·강진규 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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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행복한 댓글 0건 조회 6회 작성일 24-06-24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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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말아야 할 것은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해야 하는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영희씨(청산 스님, 1946년생)는 아침 5시면, 그리고 저녁 5시면 어김없이 부처님 앞에 앉아 기도한다. 아침에는 일본말로 불경을 외우며 기도하고, 저녁에는 한국말로 천수경과 화엄경을 외우며 기도한다. 나이 탓에 부쩍 자주 깜박하는 그가 결코 잊지 않는 건 기도. 기도란 거기 있는 것.
부모님이 경남 진주 출신으로, 진주를 고향으로 생각하는 그가 주지로 있는 보덕사(宝德寺)는 일본 나라현 이코마시에 있다. 이코마역 인근 마을 중간에 자리하고 있는데, 제주도 출신들이 1959년에 십시일반 돈을 모아 지은 특별한 절이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오사카와 나라에 이주해 살던 제주도민들은 이코마산 곳곳에 절을 짓고, 타국에서 세상을 떠난 가족들의 영혼을 모셨다. 빈집 같은 깊은 정적이 감돌지만 강영희씨가 주지로 초대되어 온 1998년까지도 보덕사는 음력 사월초파일이면 발 디딜 곳이 없을 만큼 한국인 신자들로 북적였다. 일본의 절들은 양력으로 사월초파일을 지낸다.
지금 이 절을 찾는 한국인은 한 명도 없습니다. 강영희씨의 표정은 담담하고, 얼굴빛은 맑다.
사월초파일에 보덕사에 모여 함께 한국에서처럼 연등을 만들어 달고, 밥을 지어 나누어 먹었던 한국인들. 그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이름으로만 남아 있다. 법당 한쪽에 길게 걸린 나무판에 새겨진 한국인의 이름은 500개가 넘는다.
일본인 신도들만 찾아오지만, 강영희씨는 보덕사가 여전히 한국의 절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기억하기로, 이코마산 주변엔 스무 개 넘는 한국인 절이 있었다. 그만큼 재일조선인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 상당수는 일제강점기에 이코마터널을 뚫을 때 인부로 일본에 들어왔다. 오사카와 나라를 잇는 이코마터널은 일본 5대 건설회사 오마야시구미가 이코마산에 뚫은 터널. 산의 지반이 약하고 물이 많아 터널공사가 불가능했지만 건설회사는 이익을 위해 공사를 강행하며 조선인을 인부로 모집하거나 동원했다. 조선인 인부는 수천명이 동원되고, 건설회사는 이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갱 입구를 봉쇄하기도 했다. 1913년 1월26일 천장과 암벽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 조선인 노동자 152명이 매몰되고 많은 사상자가 나왔지만 건설회사는 그대로 매장해버렸다. 1911년 6월 시작한 이코마터널은 1914년 3월 마침내 완공되지만 그사이에도 많은 조선인 인부들이 죽거나 다쳤다. 이후에도 사건사고가 빈발하자 일본 정부는 1964년 터널을 폐쇄한다. 현재 이코마터널은 두 개로, 그중 하나는 폐쇄했던 이코마터널을 보수, 활용해 1984년 새롭게 완성한 터널이다.
그리 밝지 않은 보덕사 운명에 대해 강영희씨는 생각지 않는다. 기도할 뿐입니다. 매일매일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로하며,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합니다.
캄보디아인 통역사 킴 렉카나, 나는 오늘도 울어요
검은 개와 마지막 정류장
‘참외와 오키나와 소년’ 우에즈 노리아키씨
강영희씨가 스님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그의 큰아버지는 시모노세키에서, 아버지는 오사카에서 스님으로 살다 돌아가셨다. 그는 큰아버지가 주지스님으로 계시던 시모노세키의 한국인 절에서 1년 동안 수행하고 스무 살에 스님이 됐다. 스님의 신분으로 결혼을 하고 아들을 뒀다. 어느 날부턴가 그가 기도할 때 아들 강진규(1979년생)가 함께한다. 아버지를 따라 한국말로 천수경과 화엄경을 외우며 리듬과 운율을 체화하고 있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스스로 일본인이란 느낌이 더 강하지만, 보덕사가 한국의 절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은 오지 않지만 그래도 한국 절로 보존시키고 싶습니다. 어떤 것이든 완전히 100% 보존할 수 없습니다. 형태, 형식으로라도 보존해 이어가야 합니다. 나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보덕사를 존속시키고 싶습니다. 나 개인의 정체성은 일본이지만, 내가 보존하고 싶은 절은 한국 절이기 때문에 한국 스님으로서의 아버지가 갖고 계신 정체성을 이어서 가져가려 합니다. 학문으로 배운다고 내 것이 되지 않습니다.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게 인스타 한국인 팔로워 있습니다. 기도 역시 그렇습니다. 일본 신자조차 찾지 않는 때가 오면 보덕사를 문화재로라도 남기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이곳에 모셔져 있는 한국인들 때문입니다.
‘스위스 메시’라 불리는 제르단 샤키리(33·사진)가 ‘원더골’로 다시 조국을 구했다. 2024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2024) A조에서 독일 외 16강 진출팀은 최종전에서 가려지게 됐다.
스위스는 20일 독일 퀄른의 라인에네르기슈타디온에서 열린 유로 2024 조별리그 A조 경기에서 스코틀랜드와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스위스는 1승1무를 거둬 승점 4점으로 조 2위를 지켰다.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독일에 대패했던 스코틀랜드는 이날 무승부(승점 1점)로 16강 진출 희망을 이어갔다.
스코틀랜드가 선제골을 넣었다. 전반 13분 역습 과정에서 스콧 맥토미네이의 왼발 슈팅이 수비수를 맞고 굴절되면서 들어갔다. 스위스도 비교적 빠른 시간에 동점골을 뽑았다. 전반 26분 상대 진영에서 백패스 실수를 끊어낸 샤키리가 페널티아크 부근에서 바로 때린 왼발 슈팅이 그대로 골문 왼쪽 상단을 뚫었다. 이후 양 팀의 공방은 무위에 그쳤지만, 샤키리의 골은 대회 최고의 골 후보에 올라도 손색없을 만큼 폭발력이 엄청났다.
샤키리는 왼발을 주로 쓰는 스위스 에이스로, 왼발 능력이 탁월해 팬들 사이에서는 ‘스위스 메시’로 불린다. 바이에른 뮌헨, 인터밀란, 리버풀 등 빅클럽에서 커리어를 쌓은 뒤 현재 시카고 파이어(미국)에서 뛰는 그는 스위스를 대표해 A매치 123경기에 출전해 통산 31골을 넣는 동안 수많은 골 하이라이트를 남겼다.
이번 대회 예선 벨라루스전에서도 왼발 선제골에 이어 2-3으로 뒤진 경기 막판 정교한 프리킥으로 도움을 기록하며 팀에 중요한 승점을 안겼다. 유로 2016 16강전 폴란드전 0-1로 뒤진 상황에서 터뜨린 환상적인 시저스킥 동점골도 ‘역대급’ 골 장면으로 평가된다.
샤키리는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조별리그 세르비아전에서도 경기 종료 직전 결승골(2-1 승)을 넣었다. 이 골 역시 대회 최고의 골 중 인스타 한국인 팔로워 하나로 꼽혔다. 유로 2020 조별리그 최종전 튀르키예전에서도 멀티골을 기록하며 토너먼트 진출에 기여했다.
스위스의 무라트 야킨 감독은 샤키리는 오늘 밤 자신이 이런 순간에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샤키리를 향해 엄지를 들었다. 팀 동료인 수비수 마누엘 아칸지는 그런 골을 넣을 수 있는 다른 선수가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고 놀라워했다.
샤키리는 스코틀랜드전 득점으로 사상 최초로 6개 메이저 대회 연속 골을 넣은 선수라는 기록도 작성했다.
군기훈련(얼차려)을 받다가 쓰러져 이틀 만에 숨진 박모 훈련병의 추모 분향소에 19일 시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시민들은 병역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입대한 젊은이의 어이없는 죽음에 안타까움과 분노를 나타냈다. 박 훈련병의 부모는 분향소를 찾아온 추모객들에게 인사를 나누며 고마움을 전했다.
군인권센터는 박 훈련병의 수료식 날인 이날 오전 11시부터 서울 용산구 용산역광장 앞에 시민 추모분향소를 열었다. 분향소가 차려진 지 1시간 만에 헌화하고 분향한 시민이 50명이 넘었다. 음료 등 추모 물품을 제대 위에 올려놓고 가는 시민도 있었다. 제대 오른쪽에는 메모지에 추모 메시지를 써서 붙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다. 시민들은 ‘고귀한 생명이 나라를 위해 복무하러 갔다가 허망하게 갔다’ ‘억울한 죽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등의 추모사를 써서 붙였다.
박 훈련병의 부모는 오후 6시 15분쯤부터 분향소에서 조문객들을 맞이했다. 박 훈련병의 아버지는 손수건을 꺼내 들어 연신 눈물을 훔쳤고, 어머니는 제대 오른쪽에 비치된 아들의 사진을 쳐다보다가 쓰다듬다가 했다.
박 훈련병의 부모는 분향소를 찾은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 정치인들과 대화를 나누며 진상규명을 당부했다. 어머니는 박 훈련병 사진을 가리키며 이렇게 씩씩한 애가 군대 간 지 9일 만에 죽었다며 나는 얘만 돌려주면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가정이 파괴됐고 살아갈 힘도, 아무 의미도 없다고 하소연했다.
휴가를 나와 용산역에 도착한 군인들이 삼삼오오 지나가다가 분향소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기도 했다. 전역이 60일가량 남았다는 A씨는 답답한 마음뿐이라며 군대가 편안한 조직이 아니라는 것을 고려해도, 이번 사건에서는 중대장이 훈련병을 교육하는 방식이 적절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2015년 12사단에서 훈련소 생활을 했다는 우장민씨(30)는 같은 사단 출신으로서 남의 일 같지가 않다며 사건이 터지면 꼬리자르기 하는 군대의 일 처리가 여전하다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우씨는 군대에 불려갈 때는 대한의 아들이고 죽거나 다치면 남의 아들이 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2년 전 전역했다는 B씨는 헌법에까지 병역의 의무를 써두고 이행하게 하면서 장병들의 대우는 이렇게 하는 것이 말이 되냐며 책임자 처벌이 우선일 것 같은데 수사가 빨리 이뤄지지 않는 것 같아서 답답하다고 말했다.
오모씨(28)는 A4 한 장 분량의 편지를 써서 군인권센터에 전달했다며 얼마 전 있었던 채 상병 사건과 겹쳐 보인다고 말했다. 오씨는 채 상병도 12사단 훈련병도 열심히 복무한 것뿐인데 안타까운 일을 당했다며 사회가 병역의 의무를 지는 병사들을 가치 있게 다뤄달라고 편지에 썼다고 말했다.
아들을 둔 부모들도 찾아왔다. 헌화를 마친 중년 여성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모습도 보였다. 아들의 전역을 기다리고 있다는 김옥화씨(51)는 제대가 얼마 남지 않은 아들을 둔 부모로서 매번 이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며 군대는 아이들이 가고 싶어서 간 것도 아니고 국가가 시켜서 간 건데 이런 일까지 겪어야 하나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김은정씨(48)는 일부러 검은 옷을 차려입고 왔다고 했다. 김씨는 우리 아들도 지난 4월에 군대에 갔는데 소식을 듣고 충격이 너무 컸다며 폐쇄적인 조직이라 그런지 진상 규명도 더딘 것 같아 지켜보는 중이라고 말했다.
군인권센터는 이날 박 훈련병 어머니의 편지를 공개했다. 박 훈련병 어머니는 신병대대 수료식 날인데 수료생 251명 중 우리 아들만 없다며 사건 전후 군의 대처가 미진했다고 지적했다. 어머니는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 셋째도 안전하게 훈련시켜 수료식 날 보여드리겠다’던 대대장님의 말을 기억한다며 우리 아들의 안전은 0.00001도 지켜주지 못했는데 어떻게, 무엇으로 책임지실 건가, 아들 장례식에 오셔서 말씀했듯 ‘그날 부대에 없었다’고 핑계를 다실 건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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