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동의 사소한 물음들]‘키다리 아저씨’ 김판수의 노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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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행복한 댓글 0건 조회 5회 작성일 24-06-12 02:35본문
인스타 좋아요 늘리기 수재 소리를 들으며 1961년 서울대 영문과에 입학한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청년은 친구의 삼촌인 영국 케임브리지대 국제법 전공 박노수 교수로부터 친구와 함께 유학을 오라는 멋진 제안을 받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보릿고개조차 힘겹게 넘던 때, 국경을 넘어 유학을 가는 것은 조선시대 박지원이 사절단에 뽑혀 청나라 열하를 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가자. 청년은 학교 입학 후 1964년 ‘한일협정 반대 학생 동조 단식’에 참여하는 등 나름 의협심이 강했습니다. 박정희 군부독재에 비판적 인식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싶은 기대와 용기도 충만했습니다. 청년은 케임브리지대에서 1년 수학 후 박노수 교수 추천을 받아 덴마크 코펜하겐의 국제학교 ‘인터내셔널 피플스 칼리지(IPC)’ 영화학과에 입학했습니다. 호수가 있는 아름다운 캠퍼스에서 핀란드에서 온 눈동자가 지중해처럼 푸른 소녀 에텔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인생의 20대는 무엇을 해도 좋고 아름다운 생의 봄날이었습니다.
하지만 곧 어둠이 드리웠습니다. 1967년 7월 ‘동백림 사건’이라 불리는 ‘동베를린유학생간첩단사건’이 터졌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3선 개헌을 위한 부정선거로 반대 여론과 시위가 빈번하자 국면전환을 위한 조작사건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케임브리지대 시절 왕래가 자유롭던 동베를린을 두 차례 견학 다녀온 적 있던 청년은 그 검은 마수가 자신에게도 뻗칠 수 있다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습니다. 가자. 1968년 모든 꿈을 접고 자진 귀국했습니다. 평범한 회사원이 돼 또래인 소설가 이청준, 평론가 염무웅, 시인 김지하 등과 어울려 평온한 일상을 찾아갔습니다.
‘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옥고
그러던 1969년 5월1일 밤, 낯선 사내들이 방문했습니다. 가자. 이번에 그가 간 곳은 더 이상 아름다운 곳이 아니었습니다. 중앙정보부의 비밀스러운 안가 고문실이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1987년 박종철을 죽였던 물고문과 통닭구이와 몽둥이찜질과 전기고문, 잠 안 재우기 고문을 당했습니다. 고문하다 죽으면 휴전선 철책 안에 던져놓으면 그만이라 했습니다. 순하게 생긴 놈이 되게 악질이란 말도 들어야 했습니다. ‘일본을 경유한 동유럽유학생간첩단사건’. 언론은 군부정권의 조작 발표를 그대로 받아 적었습니다.
그렇게 감옥에 갇혀 5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주범으로 몰린 박노수 교수와 당시 공화당 국회의원 김규남은 1972년 7월 사형당했습니다. 그날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통혁당의 신영복, 박성준 등이 대전형무소 동기들이었습니다. 인쇄조판공으로 출력하다 우연한 기회에 감옥 내 악대로 가게 되었습니다. 독학으로 기타와 작곡법을 배웠습니다. 음악은 지친 그를 위로해주는 한 줄기 빛이었습니다. 연습용 대중가요 악보 100여곡을 필사한 뮤직노트에 ‘김민혁 작사·작곡’의 유령 노래 11곡을 숨겨 나왔습니다. 민혁은 ‘민중혁명’의 줄임말이었습니다.
그 눈물겨운 노래가 52년 만에 비로소 대전형무소 문을 나와 우리 앞에 섭니다. 여든넷이 된 청년은 영문학자도, 세계적인 영화감독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끄럽지 않기 위해 쉴 틈 없이 일했습니다. 그는 9남매의 맏이였습니다. 감옥에서 독학한 인스타 좋아요 늘리기 일본어와 독일어로 수백편의 해외 기술 논문을 번역하고, 공부해서 금속도금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생활의 안정을 찾은 후로는 이 사회의 참된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을 수십년 보이지 않게 돕는 ‘키다리 아저씨’가 되었습니다.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이 겪은 한국현대사의 비극과 고행을 계급장처럼 내세우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가자. 여든이 되던 해. 청년은 그간 모아온 것을 사회로 환원해 모든 생명의 평화와 평등을 지향하는 이들의 사랑방인 ‘익천문화재단 길동무’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여섯 박스의 경옥고
‘바람의 세월’, 그 10년에 대하여
내 마음속 ‘파블로 네루다 문학학교’
노래 연습하는 그가 아름다워
2024년 7월4일, 홍대 앞 구름아래소극장. 그만 부끄러워하시라고 ‘꽃다지’ 젊은 벗들이 무대에 함께 서줍니다. 국가폭력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도 오뚝이처럼 일어서서 멋진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준 청년 김판수. 수줍어하며 52년 전 대전형무소로 돌아가 열심히 악보를 보며 노래 연습을 하는 그가 참 아름답습니다. 어떠한 비극, 절망 속에서도 인생은 아름답고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는 그의 간절한 말이 어떤 혁명적 언사보다 소중하게 들립니다. 여든이 되면 저도 이 고마운 세상에 무엇인가를 내놓고 가야겠지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7월4일 구름아래소극장에서 뵐게요.
가자. 청년은 학교 입학 후 1964년 ‘한일협정 반대 학생 동조 단식’에 참여하는 등 나름 의협심이 강했습니다. 박정희 군부독재에 비판적 인식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싶은 기대와 용기도 충만했습니다. 청년은 케임브리지대에서 1년 수학 후 박노수 교수 추천을 받아 덴마크 코펜하겐의 국제학교 ‘인터내셔널 피플스 칼리지(IPC)’ 영화학과에 입학했습니다. 호수가 있는 아름다운 캠퍼스에서 핀란드에서 온 눈동자가 지중해처럼 푸른 소녀 에텔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인생의 20대는 무엇을 해도 좋고 아름다운 생의 봄날이었습니다.
하지만 곧 어둠이 드리웠습니다. 1967년 7월 ‘동백림 사건’이라 불리는 ‘동베를린유학생간첩단사건’이 터졌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3선 개헌을 위한 부정선거로 반대 여론과 시위가 빈번하자 국면전환을 위한 조작사건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케임브리지대 시절 왕래가 자유롭던 동베를린을 두 차례 견학 다녀온 적 있던 청년은 그 검은 마수가 자신에게도 뻗칠 수 있다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습니다. 가자. 1968년 모든 꿈을 접고 자진 귀국했습니다. 평범한 회사원이 돼 또래인 소설가 이청준, 평론가 염무웅, 시인 김지하 등과 어울려 평온한 일상을 찾아갔습니다.
‘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옥고
그러던 1969년 5월1일 밤, 낯선 사내들이 방문했습니다. 가자. 이번에 그가 간 곳은 더 이상 아름다운 곳이 아니었습니다. 중앙정보부의 비밀스러운 안가 고문실이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1987년 박종철을 죽였던 물고문과 통닭구이와 몽둥이찜질과 전기고문, 잠 안 재우기 고문을 당했습니다. 고문하다 죽으면 휴전선 철책 안에 던져놓으면 그만이라 했습니다. 순하게 생긴 놈이 되게 악질이란 말도 들어야 했습니다. ‘일본을 경유한 동유럽유학생간첩단사건’. 언론은 군부정권의 조작 발표를 그대로 받아 적었습니다.
그렇게 감옥에 갇혀 5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주범으로 몰린 박노수 교수와 당시 공화당 국회의원 김규남은 1972년 7월 사형당했습니다. 그날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통혁당의 신영복, 박성준 등이 대전형무소 동기들이었습니다. 인쇄조판공으로 출력하다 우연한 기회에 감옥 내 악대로 가게 되었습니다. 독학으로 기타와 작곡법을 배웠습니다. 음악은 지친 그를 위로해주는 한 줄기 빛이었습니다. 연습용 대중가요 악보 100여곡을 필사한 뮤직노트에 ‘김민혁 작사·작곡’의 유령 노래 11곡을 숨겨 나왔습니다. 민혁은 ‘민중혁명’의 줄임말이었습니다.
그 눈물겨운 노래가 52년 만에 비로소 대전형무소 문을 나와 우리 앞에 섭니다. 여든넷이 된 청년은 영문학자도, 세계적인 영화감독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끄럽지 않기 위해 쉴 틈 없이 일했습니다. 그는 9남매의 맏이였습니다. 감옥에서 독학한 인스타 좋아요 늘리기 일본어와 독일어로 수백편의 해외 기술 논문을 번역하고, 공부해서 금속도금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생활의 안정을 찾은 후로는 이 사회의 참된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을 수십년 보이지 않게 돕는 ‘키다리 아저씨’가 되었습니다.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이 겪은 한국현대사의 비극과 고행을 계급장처럼 내세우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가자. 여든이 되던 해. 청년은 그간 모아온 것을 사회로 환원해 모든 생명의 평화와 평등을 지향하는 이들의 사랑방인 ‘익천문화재단 길동무’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여섯 박스의 경옥고
‘바람의 세월’, 그 10년에 대하여
내 마음속 ‘파블로 네루다 문학학교’
노래 연습하는 그가 아름다워
2024년 7월4일, 홍대 앞 구름아래소극장. 그만 부끄러워하시라고 ‘꽃다지’ 젊은 벗들이 무대에 함께 서줍니다. 국가폭력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도 오뚝이처럼 일어서서 멋진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준 청년 김판수. 수줍어하며 52년 전 대전형무소로 돌아가 열심히 악보를 보며 노래 연습을 하는 그가 참 아름답습니다. 어떠한 비극, 절망 속에서도 인생은 아름답고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는 그의 간절한 말이 어떤 혁명적 언사보다 소중하게 들립니다. 여든이 되면 저도 이 고마운 세상에 무엇인가를 내놓고 가야겠지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7월4일 구름아래소극장에서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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