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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카프카는 누구의 것이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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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행복한 댓글 0건 조회 11회 작성일 24-06-19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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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아침에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난 에바 호페는 자기가 상속권을 박탈당한 상속녀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이 문장에서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소설 <변신>의 도입부가 떠오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미국-이스라엘 작가 베냐민 발린트가 쓴 <카프카의 마지막 소송>은 올해 사망 100주년을 맞은 카프카의 유고에 대한 소유권을 두고 에바 호페라는 한 여성과 두 국가(이스라엘·독일) 사이에 벌어진 소송을 다룬 책이다. 저자가 다큐멘터리처럼 짜임새 있게 재구성한 이 소송의 전말은 ‘카프카적’이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은 부조리와 역설로 가득 차 있다.
2016년 8월7일 이스라엘 대법원은 하급법원들의 판결을 만장일치로 확정함으로써 9년 간의 법적 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에 따라 에바 호페가 카프카의 친구 막스 브로트의 비서였던 자신의 어머니 에스테르로부터 물려받은 카프카의 원고는 이스라엘 국립도서관으로 넘어갔다. 에바는 단 한푼의 보상금도 받지 못했다.
소송은 2007년에 시작됐으나 소송의 기원은 이보다 80여년 전으로 거슬러간다. 카프카는 마흔한 살 생일을 인스타 좋아요 늘리기 앞둔 1924년 6월3일 빈 외곽의 한 요양원에서 인스타 좋아요 늘리기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브로트는 6월11일 장례식을 마친 뒤 카프카의 책상에서 미발표 원고와 편지, 스케치와 함께 카프카가 남긴 메모를 발견했다. 카프카는 마지막 부탁이라면서 공책과 원고와 편지, 그리고 스케치 등등은 읽지 말고 남김없이 불태워 없애달라고 요청했다. 카프카는 또 브로트가 이미 소유하고 있던 자신의 글과 그림은 물론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것까지 모두 회수해서 없애달라고 당부했다.
브로트는 카프카의 유언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카프카의 흔적이 있는 물건이라면 찢겨진 종이 한 장조차 버리지 않았다. 유럽이 히틀러의 그림자에 뒤덮이기 시작하던 1939년에는 팔레스타인으로 도피해 유대인 절멸을 시도한 나치로부터 카프카의 원고를 지켜냈다.
브로트는 카프카를 배신했느냐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카프카의 원고와 편지를 출판하는 데 바친 브로트의 헌신과 노력이 없었더라면 살아서 무명이었던 카프카가 문학사의 가장 빛나는 성좌에 오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시인 W. H. 오든(1907~1973)은 단테, 셰익스피어, 괴테가 저마다 살았던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이라고 할 때, 우리 시대에는 그런 예술가로 누가 있겠는가 하는 질문을 받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카프카라고 말했다.
브로트는 1942년 자신처럼 체코를 떠나 팔레스타인으로 망명했던 오토 호페를 만나 각별한 사이가 됐다. 오토의 아내 에스테르는 브로트의 비서로 일하면서 카프카 유고 정리 작업을 도왔으나 급여는 받지 않았다. 에바는 어머니 에스테르가 브로트를 정신적으로 사랑했다고 말했다. 자식이 없었던 브로트는 호페 부부의 두 딸을 친자식처럼 아꼈다.
브로트는 1968년 12월 83세에 세상을 떠났으나 그 이전인 1948년과 1961년 유언장에서 에스테르를 자신의 유일한 상속인 겸 유언 집행자로 지정했다. 1952년에는 <소송>, ‘어느 투쟁의 기록’, ‘시골의 결혼 준비’ 원본 원고, 카프카가 아버지에게 쓴 편지, 일기, 카프카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 등이 포함된 카프카의 유고들을 증여한다는 증서도 작성했다. 에스테르와 에바는 카프카의 유고를 텔아비브 자택, 텔아비브은행, 스위스 취리히 UBS은행 등에 나눠 보관했다.
브로트가 죽은 지 5년이 지난 1973년 이스라엘 정부가 개입하면서 소송의 불씨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에스테르가 카프카의 친필 원고를 외국에 팔 것을 우려해 국가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소송을 걸었다. 당시 텔아비브 지방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브로트의 유언에 따라 호페 부인은 생존 기간에는 브로트 유산을 원하는 대로 처리해도 된다(···)당부의 의도가 분명하니만큼, 다른 해석은 허용될 수 없으리라고 판단된다.
이스라엘 정부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스라엘 국립도서관은 에스테르가 2007년 101세로 사망하자 모친의 유산을 물려받은 에바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2012년 텔아비브 가정법원과 2015년 항소심 재판부는 브로트의 유언을 언급하며 에스테르에게 카프카의 친필 원고를 매각, 처분, 상속할 권리가 없다고 판결했다. 브로트는 1948년 작성한 유언장에서 자신의 문필 유산을 팔레스타인 유대인을 위한 공공도서관이나 공공 아카이브에 보내달라고 당부했다. 당시 브로트는 카프카의 유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재판부는 카프카의 유고가 브로트의 문필 유산에 포함된다는 논리를 펼쳤다.
브로트가 사망한 뒤 에스테르가 카프카의 유고를 경매에 내놔 여론이 나쁘게 돌아간 측면도 있다. 에스테르는 1974년 카프카가 브로트에게 보낸 편지 22점과 엽서 10점, 1981년에는 카프카 단편소설 ‘시골의 결혼 준비’ 서명본, 1988년에는 <소송> 원본을 경매에 내놨다. 특히 <소송>의 경매를 앞두고는 브로트가 나치의 손아귀에서 목숨 걸고 구해낸 원고를 팔아먹는다는 비판이 나왔다.
책을 관통하는 질문은 ‘카프카는 누구의 것이어야 하나’라는 것이다.
카프카는 이스라엘의 것인가. 카프카는 유대인이었지만 고향인 프라하를 거의 떠나지 않았던 그의 모국어는 독일어였다. 카프카는 독일어로 생각하고 독일어 책을 읽었으며 독일어로 글을 썼다. 카프카가 가장 흠모했던 작가는 독일 문학의 거장 괴테였다. 유대 전통에 깊은 관심을 갖고 이디시어 낭독의 밤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열렬한 시오니즘(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사상) 추종자였던 브로트와 달리 인스타 좋아요 늘리기 시오니즘과는 거리를 뒀다.
이스라엘은 카프카에 별 관심이 없었다. 이스라엘 최초의 카프카 학회는 1983년에 열렸는데 행사를 주최한 것은 텔아비브의 오스트리아 대사관이었다. 독일에서는 이미 2차 세계대전 이전에 카프카 전집이 출간됐고, 스페인어판 전집도 1960년에 나왔다. 반면 이스라엘에서는 아직까지도 히브리어판 카프카 전집이 나오지 않았다. 이스라엘에는 카프카의 이름으로 된 문학상도 없고, 카프카의 이름이 붙은 거리도 없다.
저자는 독일의 언어와 독일 문학에 대한 반감, 이스라엘 건국 이전의 디아스포라 문화에 대한 혐오감 등이 카프카에 대한 이스라엘 사회의 무관심의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농업, 도시계획, 사회복지 실무들을 중시했던 이스라엘 첫 세대는 카프카의 상상력에 포함된 마조히즘의 요소들이나 그의 실패자 감성을 포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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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 과정에서 독일의 마르바흐 아카이브가 변호사를 통해 카프카의 유고를 독일로 가져가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도 흥미롭다. 마르바흐 아카이브 측은 이스라엘은 카프카 유고를 가져가 연구할 역량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카프카의 여동생들은 강제수용소에서 사망했다. 홀로코스트가 존재하는 한 독일이 카프카를 소유할 명분은 없었다. 카프카는 연인 밀레나에게 쓴 편지에서 나는 독일인들과 어울려 살아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했다. 저자는 독일이 과거의 도덕적 오점을 제거하는 방법이자 추락한 위신을 회복하는 방법이며, 히틀러와 괴벨스의 허무주의적 악다구니로 오염되기 전의 독일어를 되찾아올 방법이라는 인식에서 카프카의 유고를 차지하려 했다고 짚었다.
저자는 일정한 거처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데 몰두하는 작가에게 소유적 태도를 취했다는 것도 이 마지막 소송의 수많은 아이러니 중 하나라고 말한다. 삶에서도 문학에서도 그 동경이 그를 고질적 무국적, 무소속 상태로 몰아넣었다. 그의 소설에는 지명이 나오지 않는데, 그것은 어쩌면 그가 자기 자신을, 그리고 자기 작품을 국가적 또는 종교적 소속이라는 위안의 닻줄로부터 풀어버렸다는 것과 연결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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