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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나로 살기로 했다] 제도와 현실의 디커플링 “제도는 다 있다, 왜 굴러가지 않는가” [플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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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행복한 댓글 0건 조회 42회 작성일 24-03-21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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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저출산 주범, 너희가 좋다‘1억 주면 낳을거냐’ 물음에여전히 많은 여성들의 답은 아니오각종 제도 ‘맞벌이·정규직’ 대상‘비정규직·외벌이’는 밀려나모든 노동자가 일과 돌봄 양립토록제도 의무화하고 정부가 지원을
부장님이 저한테 10번이나 물어보더라고요. ‘1억원 주면 애 낳을 거야?’라고요. 그래서 대답했죠. ‘1억원 갖고는 못 낳는다’고요.
금융업계에서 사무직으로 일하고 있는 배유진씨(29·가명)는 이렇게 말했다. 유진씨는 이명박 정부 당시 고졸 취업과 직업 교육 지원 정책으로 대기업에 입사해 10년째 다니고 있다. 대학 학자금을 대출받지 않았고 사회 진출이 빨랐기에 지금은 ‘잘 인스타 팔로워 살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돈을 벌었다. 하지만 만약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키워낸다고 생각하면 걱정이 앞선다.
지금 우리 사회에선 좋은 데 취직하려면 무조건 대학을 가야하고, 그러기 위해 어릴 때부터 사교육에 돈을 쏟아부어야 하잖아요. 1억 준다고 모든 게 해결되나요? 정작 낳은 아이를 어떻게 키울지에 대한 고민은 사회 전반에 없는 것 같아요.
정부는 2006년 이후 수백조원이 넘는 돈을 투입해 수많은 저출생 대책을 내놨다. 부영그룹의 ‘1억원 지원’ 등 민간 기업에서 출산지원금을 지급하는 사례도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유진씨를 포함한 많은 여성은 이런 파격적인 혜택을 거부하면서까지 여전히 아이 낳지 않기를 ‘선택’하겠다고 말한다.
수많은 대책이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여성들은 결혼 여부나 아이의 존재와 상관없이 지금 당장 삶 자체가 불평등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게 근본적인 문제라고 말한다. 경향신문 플랫팀이 2030 여성 1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초점집단면접(FGI)에서 참여자들은 일과 가정 중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버려야 하는 성차별적 구조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했다. 여성의 생애 과업이 일 중심으로 바뀌었는데도 제도는 이들의 삶과 동떨어져 현실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근본 원인을 뜯어고치지 않고 단순히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으면 지원한다’는 식의 대책만 이어지니 외면받을 수밖에 없다.
국책연구원에서 계약직 연구원으로 일하는 이우연씨(30·가명)는 정부가 가정 단위의 재생산 관점에서 인구 정책에는 관심이 대단하다. 그러나 그 가정 안에서 개인들이 안전과 평화를 어떻게 누릴 것인지에 대해선 무지하고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돈을 지원하는 게 대단한 지원책인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국가를 지켜내기 위해 ‘가정’이라는 단위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생각만 들어요. 지금 나는 전혀 행복하지도, 안전하지도 않고 누가 많이 도와주지도 않는 상황이에요. 그런데 다음 세대의 아이를 어떻게 키울지 생각하면 너무 절망스럽거든요.
김현미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현재 저출생 정책은 ‘아이를 몇 명 낳으면 얼마 준다’는 식의 교환 체제다. 그런데 그 교환에 상응하는 선택지가 개개인을 돌봄노동 전담자로 몰아넣는 것이라며 현 제도는 인간을 ‘상품’으로 보고 있고, 여기엔 ‘돈이 필요하면 아이를 낳으라’는 식의 계급주의적 메시지가 들어가 있다. 사람을 보는 시각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저출생 대책의 수혜 대상에서부터 여실히 드러난다. ‘정규직 맞벌이 4인 가족’을 표준으로 설계된 육아휴직 제도는 국가가 ‘어떻게 아이를 키울지’보다 ‘어떻게 출산율을 높일지’에 대해서만 고민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계약직으로 일하다 임신하면서 회사를 그만두게 된 이수민씨(36·가명)는 ‘3+3 부모육아휴직제’가 맞벌이 부부에게만 적용된다는 걸 알게 된 뒤 남편에게 미안하다는 감정이 들었다고 했다. 3+3 육아휴직제는 자녀가 생후 12개월이 될 때까지 부모 모두 육아휴직을 사용하면 첫 3개월간 각각 통상임금의 100%(월 최대 300만원)를 지급하는 제도다. 수민씨는 계약직으로 전시 기획 관련 업무를 8년간 했지만, 정규직이 사용하는 출산휴가·육아휴직 제도를 요구하지 못하고 퇴사를 ‘선택’했다.
남편 동료 한 명이 저와 비슷한 시기에 출산했는데, 맞벌이 부부여서 월급을 보전받았대요. 이런 혜택이 있는데도 ‘나 때문에’ 남편이 받지 못했나 하는 자책을 했어요. 하지만 제가 직장을 유지하지 못한 건 떠밀려서인데요.
수민씨의 사정을 제도는 헤아려주지 않는다. 그는 어린이집 등록도 우선 순위에서 밀리고 외벌이 가구는 실질적 혜택이 적다며 남편은 남편대로 육아휴직을 하고 싶어도 제가 소득이 거의 없기 때문에 못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육아휴직자 및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사용자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육아휴직자는 12만6008명이었는데 그중 여성이 9만672명으로 72%를 차지했다. 남성 육아휴직자가 늘었지만, 여전히 여성의 3분의 1 수준에 그친다. 기업 규모별로도 차이가 크다. 지난해 육아휴직 사용자 중 중소기업 노동자는 55.6%(7만95명), 대기업 노동자는 44.4%(5만5913명)였다. 국내 전체 임금 근로자 중 대기업 정규직이 약 12%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제도권 안에서 혜택 받을 수 있는 이들은 극소수라는 뜻이다.
한국의 출산·육아휴직 제도는 선진국들만큼 기간이 보장돼 있다. 한국 남성이 쓸 수 있는 육아휴직 기간은 52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길다. 문제는 한국의 2020년 육아휴직 사용률은 남녀 모두 20개국 중 OECD 최하위라는 점이다. 플랫팀 FGI에 참여한 여성들 역시 정부에서 내놓은 저출생 대책 자체는 많다. 그걸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FGI에 참여한 비정규직 여성 7명 인스타 팔로워 중에서 출산 휴가와 육아휴직을 사용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실제 고용노동부의 ‘2022년 일·가정 양립 실태조사’에 따르면 300인 이상 사업체의 경우 육아휴직이 필요하면 모두 사용할 수 있다고 답한 비율이 95.1%였지만, 10~29인 사업체는 이 비율이 50.8%까지 뚝 떨어진다.
국책연구원에서 계약직 연구원으로 일하는 우연씨는 여성이 많은 직군이다 보니 내부에서 고용 형태상 차별이 두드러진다고 말했다. 정규직 연구원이 사용할 수 있는 출산휴가·육아휴직 같은 제도를 위촉연구원, 연구조사원 등 계약직 연구원들은 사용할 수 없다.
콜센터에서 일하는 구영지씨(33·가명)는 2019년비 노조가 생기기 전에는 보건휴가나 가족돌봄휴가 등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콜센터는 결원이 생기면 나머지 인원이 나눠서 콜을 받아야 하는 구조다. 회사는 인원 공백을 막기 위해 육아기 근로단축제도 등을 홍보조차 하지 않았다. 영지씨는 노조에서 4년 내내 교육해서 제도를 사용하도록 바꿔나가고 있다며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임신 계획이 있는 경우 입사할 수조차 없다 보니 주로 40대의 경력단절 여성이 많았는데, 최근엔 20~30대 여성들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도 갈 길은 멀다. 그는 난임 치료를 위해 한달에 4~5번씩 난임 센터에서 검사를 받아야 한다. 한달간 유급 난임 휴가와 60일 질병 휴직을 쓸 수 있는 정규직과 달리 무급 휴가조차 제대로 쓰기가 쉽지 않다. 최근에 노조가 한 달에 하루 유급 난임 휴가를 얻어냈는데, 그나마도 주변 눈치가 보이면 쓰기 어려워요. 지금도 최저임금을 받으면서 열 달간 치료받았는데, 마지막까지 그냥 임금을 포기한다고 보면 돼요.
영지씨는 아예 육아휴직이나 단축근로, 돌봄 제도를 강제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중소기업이나 대기업의 차별 없이 노동자가 다 제도를 사용할 수 있게 하고, 국가가 그만큼 기업에 지원하면 다들 하지 않았을까요? 아기 낳으면 1억 준다는 것 말고 이런 제도를 더 강제화해야 해요.
이 때문에 2030 청년 여성 중에서도 제도에서 소외되고 있는 비정규직 여성들에게 정책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FGI 자문을 맡은 신경아 한림대 교수는 정규직 남성 중심이었던 ‘표준 노동생애’가 불연속적이고 불확실한 노동으로 바뀌고 있다며 불확실한 노동자 기준으로 제도를 설계하면 정규직 노동자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된다고 말했다.
또 신 교수는 제도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기업을 교육하고 독려하는 방식은 충분하지 않다며 기업과 노동자 간 갈등과 분쟁이 생겼을 때 국가가 어떻게 규제하는가의 문제로 전환하고 강제력을 동원해야 한다. 미국의 고용평등기회위원회(EEOC), 스웨덴의 노동법원과 같이 전문성을 가진 책임 있는 기관을 참고로 정부의 역할을 더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FGI에 참여한 정규직 여성들은 그나마 관련 제도를 이용할 수 있었지만, 이런 제도 사용으로 인해 일터에서 받는 차별로부터도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김민서씨(38·가명)는 사기업과 비교해 보면 임신이나 출산 관련 제도를 모두 다 사용할 수 있다면서도 제도를 많이 사용하는 쪽은 항상 여성이라고 말했다. 오후 4시쯤 회사 엘리베이터 버튼을 마구 누르며 퇴근을 서두르는 분들은 모두 여성이에요. 어린이집 하원 시간에 맞춰야 하니까요.
가정에서 자녀를 양육하지 않고 일터에서 업무에만 매진할 수 있는 남성은 상대적으로 승진하기 쉽고, 이는 회사가 남성 중심 분위기로 고착화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런 기업 문화 아래서 여성 직원은 조직의 상위 구조로 올라가기 힘들다.
금융업계에서 일하는 오누리씨(35·가명)는 사내에서 성별 분업이 확고해 영업은 남성, 관리는 여성이 주로 맡는데, 영업직이 승진이 잘 된다고 말했다. 그의 회사엔 임원 중 여성이 2명 뿐이다. 공기업에서 일하는 이가영씨(34·가명)의 남편은 ‘남초’인 업계에서 일한다. 남성들이 강한 결속력으로 자기들 사이에 통하는 언어를 쓰면 그 조직에서 여성이 비집고 들어가긴 어려워요. 그러니까 여성 직원은 승진은 물론 업무에서 배제되죠. 당연히 육아에 대한 지원이나 혜택도 유명무실하고요. 그 조직은 계속 고인물이 되는 거예요.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과거보다 나아졌다고 생각하지만, 조직 내에 남아 있는 성역할 차이는 여전히 공고하다. 돌봄을 떠맡은 여성들은 ‘비장애 남성’을 표준으로 전력질주해야 하는 조직에서 ‘2등 인력’이 된다. 회사의 의사결정구조에 여성 비율이 낮은 구조는 이렇게 이어진다. 이에 신 교수는 고인물 조직이 초저출생 사회의 원인이 아닌지 들여다 봐야 한다고 말했다. 임신·출산·육아를 일의 ‘걸림돌’이라고 여기는 후진적인 조직 문화를 바꾸는 게 여성의 삶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은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에서 ‘남녀 모두 일하고 모두 돌보는 모델’로의 전환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마경희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가구 경제에 대한 여성 역할과 기여는 늘어나고 있지만 남성이 가사노동·돌봄노동 등 무급노동을 동등하게 나눠질 수 있는 조건이 되지 않다 보니 여성은 살아남기 위해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며 ‘모두가 일하고 모두가 돌보는 사회’를 위해서는 남성은 무급돌봄을, 여성은 유급노동을 더 많이 할 수 있도록 재구조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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