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정치 과잉과 정치 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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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행복한 댓글 0건 조회 18회 작성일 24-03-29 16:21본문
한국 사회는 늘 정치에 관한 관심으로 꽉 차 있다. 선거철이 되면 몇배로 증폭된다. 어떻게 보면 온 국민이 정치평론가다. 내 주변에서도 정치 얘기만 나오면 특정 정치인들의 계보와 학연, 지연, 경력 등에 대해서 줄줄 읊어대는 사람들이 천지다. 명색이 정치학자인 내가 끼어들 새도 없이 자기들끼리 정치 논쟁하느라 바쁘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정치에 대한 구조적인, 역사적인 이해력은 거의 없다. 사실 나는 글로벌 정치나 녹색 정치 등에 집중해서인지 정치인들에 관한 세세한 사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런 현상을 규정하고자 하면 ‘정치 과잉’이 적합한 표현일까? 역설적인 것은 정치에 관한 관심은 그렇게 많은데 동시에 ‘정치 혐오’도 강하다는 사실이다. 정치 토론에 대한 결말은 대체로 국가업무에 관련된 정치인과 정당인, 그중에서도 입법부에 속하는 국회의원에 대한 비난과 경멸이다. 이런 담화는 참 위험한데 결국은 흔히들 정치적 냉소주의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놈이 그놈이다 누가 잡아봤자 오십 보 백 보다 등은 우리가 흔히 듣는 말이다. 보수적 양당제에 실망한 유권자들이 진지하게 검토했던 진보적 정당도 이제는 지리멸렬해버렸으니 이런 반응은 당연한지도 모른다(내 견해로는 오십 보와 백 보는 생각보다 큰 차이다).
정치에 대한 이미지도 부정 일변도다. 가령 그 사람 참 정치적이야!라는 발언은 그가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정치라 하면 ‘권모술수’가 떠오르니까. 국회의원이나 시도의원에 출마하겠다는 욕망을 표출하면 그건 축하할 만한 일이 되기보다는 이기적 권력욕 즉 ‘출세’ 욕망을 인스타 팔로워 마침내 드러내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것은 정치가 그동안 믿음을 보여주지 못한 탓이지만 한편으로는 유권자들이 도덕주의나 정형화된 이념에 지나치게 몰두한 탓도 있다. 이런 신념을 갖고 있으면 정치를 긍정적으로 볼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정치의 본질은 ‘진흙탕’ 속의 타협인지라 민주정에서도 순수한 동기 혹은 이념에 따라서만 정치를 해나갈 수는 없는 탓이다. 갈등이나 타협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이념주의자와 도덕주의자가 너무 많다. 하지만 갈등은 민주주의의 위대한 엔진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런 의미에서 나는 정치인들을 존경하는 편이다. 그들의 도덕적 이탈이나 과오에 그리고 정당 간의, 정치인들 간의 갈등에 관대하기도 하다. 정치는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권력은 혹은 권력 투쟁은 우리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니까. 진흙탕에 뛰어들기보다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훈수 두는 일이 안전하고 욕 덜 먹을 일이니까.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정치가란 모든 폭력성에 잠재되어 있는 악마적 힘들과 기꺼이 관계를 맺기로 한 사람이다. 근대국가가 갖게 되는 정당하고 합법적인 폭력 독점은 정치가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정치를 시장경제 영역으로부터 되도록 제거하려는 세력이 어느 민주적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관치경제와 정경유착 및 규제 일변도의 정책이나 제도는 분명 문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세력은, 자본과 시장의 ‘독재’를 막기 위한 국가나 사회의 경제 개입, 즉 정치적 제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개방, 경쟁, 탈규제는 만병통치약이고 국가개입, 규제, 계획은 시대착오적인 관습으로 인식된다. 한마디로 이들에게는 정치 논리에 대한 경제 논리의 우월성이 자동으로 전제된다.
‘더 내고 더 받기’가 말하지 않는 것
우리가 민주주의의 꽃이다
이제 ‘제 발등 찍기 정치’를 끝내자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한국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 과잉’이 아니라 되레 ‘정치 부족’ 혹은 ‘정치 약화’가 아닌가? 정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구성원, 크고 작은 다양한 집단 및 공동체의 이익 표출을 잘 수렴하고 거기서 벌어지는 갈등을 효과적이고도 비폭력적으로 조정하는 일을 말한다. 그것은 불가피하게 권력 투쟁의 모습을 띠게 된다. 정치가 실패할 때 큰 파국이 오며 그것은 결국 독재나 전체주의 그리고 심지어 ‘내전’으로 연결된다. 나는 그것을 오래전 ‘反(반)정치’로 명명한 바 있다.
‘정치 과잉’은 표피적 현실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시민의 인스타 팔로워 정치 참여는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독재 및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오랫동안 억압당한 집단적 기억이 남아 있어서일까. 당시에 ‘행정’은 강했지만 ‘정치’는 거의 부재했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은 정치를 살려야 한다. 또다시 반정치 시대로 회귀할 수는 없다. 한마디로 말한다. 정치가 부족하다.
이런 현상을 규정하고자 하면 ‘정치 과잉’이 적합한 표현일까? 역설적인 것은 정치에 관한 관심은 그렇게 많은데 동시에 ‘정치 혐오’도 강하다는 사실이다. 정치 토론에 대한 결말은 대체로 국가업무에 관련된 정치인과 정당인, 그중에서도 입법부에 속하는 국회의원에 대한 비난과 경멸이다. 이런 담화는 참 위험한데 결국은 흔히들 정치적 냉소주의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놈이 그놈이다 누가 잡아봤자 오십 보 백 보다 등은 우리가 흔히 듣는 말이다. 보수적 양당제에 실망한 유권자들이 진지하게 검토했던 진보적 정당도 이제는 지리멸렬해버렸으니 이런 반응은 당연한지도 모른다(내 견해로는 오십 보와 백 보는 생각보다 큰 차이다).
정치에 대한 이미지도 부정 일변도다. 가령 그 사람 참 정치적이야!라는 발언은 그가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정치라 하면 ‘권모술수’가 떠오르니까. 국회의원이나 시도의원에 출마하겠다는 욕망을 표출하면 그건 축하할 만한 일이 되기보다는 이기적 권력욕 즉 ‘출세’ 욕망을 인스타 팔로워 마침내 드러내는 것으로 인식한다. 그것은 정치가 그동안 믿음을 보여주지 못한 탓이지만 한편으로는 유권자들이 도덕주의나 정형화된 이념에 지나치게 몰두한 탓도 있다. 이런 신념을 갖고 있으면 정치를 긍정적으로 볼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정치의 본질은 ‘진흙탕’ 속의 타협인지라 민주정에서도 순수한 동기 혹은 이념에 따라서만 정치를 해나갈 수는 없는 탓이다. 갈등이나 타협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이념주의자와 도덕주의자가 너무 많다. 하지만 갈등은 민주주의의 위대한 엔진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런 의미에서 나는 정치인들을 존경하는 편이다. 그들의 도덕적 이탈이나 과오에 그리고 정당 간의, 정치인들 간의 갈등에 관대하기도 하다. 정치는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권력은 혹은 권력 투쟁은 우리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니까. 진흙탕에 뛰어들기보다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훈수 두는 일이 안전하고 욕 덜 먹을 일이니까.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정치가란 모든 폭력성에 잠재되어 있는 악마적 힘들과 기꺼이 관계를 맺기로 한 사람이다. 근대국가가 갖게 되는 정당하고 합법적인 폭력 독점은 정치가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정치를 시장경제 영역으로부터 되도록 제거하려는 세력이 어느 민주적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관치경제와 정경유착 및 규제 일변도의 정책이나 제도는 분명 문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세력은, 자본과 시장의 ‘독재’를 막기 위한 국가나 사회의 경제 개입, 즉 정치적 제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개방, 경쟁, 탈규제는 만병통치약이고 국가개입, 규제, 계획은 시대착오적인 관습으로 인식된다. 한마디로 이들에게는 정치 논리에 대한 경제 논리의 우월성이 자동으로 전제된다.
‘더 내고 더 받기’가 말하지 않는 것
우리가 민주주의의 꽃이다
이제 ‘제 발등 찍기 정치’를 끝내자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한국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 과잉’이 아니라 되레 ‘정치 부족’ 혹은 ‘정치 약화’가 아닌가? 정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구성원, 크고 작은 다양한 집단 및 공동체의 이익 표출을 잘 수렴하고 거기서 벌어지는 갈등을 효과적이고도 비폭력적으로 조정하는 일을 말한다. 그것은 불가피하게 권력 투쟁의 모습을 띠게 된다. 정치가 실패할 때 큰 파국이 오며 그것은 결국 독재나 전체주의 그리고 심지어 ‘내전’으로 연결된다. 나는 그것을 오래전 ‘反(반)정치’로 명명한 바 있다.
‘정치 과잉’은 표피적 현실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시민의 인스타 팔로워 정치 참여는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독재 및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오랫동안 억압당한 집단적 기억이 남아 있어서일까. 당시에 ‘행정’은 강했지만 ‘정치’는 거의 부재했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은 정치를 살려야 한다. 또다시 반정치 시대로 회귀할 수는 없다. 한마디로 말한다. 정치가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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