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아의 할매 열전]죽도 않고 늙어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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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행복한 댓글 0건 조회 24회 작성일 24-03-31 20:47본문
유난히 비가 많은 겨울이었다. 그래도 봄은, 기어이 오고야 만다. 올해도 어김없이 봄은 왔고, 매화가 가장 먼저 봄을 알렸다. 매화만 보면 나는 한동떡이 생각난다. 한동떡은 한센떡, 그러니까 훗날 장센떡이 된 이의 시어머니였다. 왜 한동떡인지는 잘 모른다. 아마 시집오기 전 살던 동네가 한동이었을 테지.
같은 동네에서 오래 같이 살았지만 나는 한동떡을 자주 보지 못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한동떡은 주로 논밭, 아니면 산에 있었고, 세월이 좀 흐른 뒤에는 집 밖 걸음을 잘 하지 않았다. 예전에 대보름날 밤이면 동네 논에서 달집을 태우곤 했다. 동네 사람 다 모인 흥겨운 자리에 종 출신인 한센 내외와 음전하기로 소문난 한동떡, 몸 약한 우리 엄마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를 무동 태운 채 아버지는 긴 다리로 겅중겅중 달집 주변을 뛰었다. 아버지의 걸음이 빚어낸 리듬은 흥겨웠고, 높이 솟은 보름달은 어쩐지 처연했다. 음전해서, 몸이 아파서, 종의 자손이라서 이 흥겨운 잔치에 끼지 못하는 한동떡과 엄마, 한센네의 삶이 처연하게 느껴진 탓이었을까?
음전한 한동떡은 엄마처럼 위가 약해 소화불량을 달고 살았다. 한동떡은 간혹 들에서 캔 약쑥의 생즙을 내 어린 손자에게 들려 보냈고, 엄마는 그 답례로 읍내 약방에서 사온 소다를 내게 들려 보냈다. 한동떡은 죽은 밤나무 가지처럼 버석하게 마른 데다 차디찬 손으로 기어이 내 손에 고구마나 콩깨잘, 곶감 같은 것을 들려 보냈다. 돈 주고 산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한동떡과 그 아들 장센 부부는 동전 한 푼 허투루 쓰지 않고 그악스럽게 인스타 팔로워 늘리기 일해 해마다 논을 불렸기 때문이다. 돈 주고 사는 것은 다 귀하디 귀한 시절이었다. 내 손에 들린 것을 볼 때마다 엄마는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당신 손주들이나 멕이제 멀라고…. 하기사 모도 빤듯하게 심는 양반잉게. 그 집 논은 삐뚠 것이 한나도 읎어야. 논두렁조차 반질반질흐당게.
휴학과 학사경고로 남보다 졸업이 일 년 반이나 늦어진 어느 날, 엄마가 한동떡 집으로 심부름을 보냈다. 뭘 갖다주라 했는데 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사립문을 들어서자 마루 끝에 한동떡이 엉덩이를 쳐든 기이한 자세로 엎드려 있고, 장센떡이 된 한센떡이 엉덩이 근처에 얼굴을 대고 있었다. 내 기척을 느낀 한동떡이 노인네라고는 믿을 수 없이 재빠른 동작으로 바지를 추켜올렸다. 늘 햇볕 속에서 일하느라 검은 땅처럼 그을린 한동떡의 얼굴이 검붉게 달아올랐다. 언제나처럼 단정하게 마루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으며 한동떡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가 추접스런 꼴을 보였네이. 늙으먼 죽어야 허는디….
한센떡, 장센떡
산목숨인디 워쩔 것이냐, 살아야제
나의 첫 할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늙은 한동떡이 절대 바깥 걸음을 하지 않았던 이유를. 한동떡은 죽지도 않고 늙어가는 것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한동떡은 왜 왔냐고 묻지 않았고, 나는 뜰방에 우두커니 선 채 왜 왔다고 말하지 않았다. 장센떡이 가만히 몸을 일으켜 수돗가로 갔다. 쭈그려 앉은 그이는 비누로 손을 씻더니 몸을 돌려 확독(돌확) 위에 있던 무언가를 꺼냈는데, 가만 보니 짙푸른 탱자나무 가시였다. 그이는 가시로 검지 손톱 밑을 꼼꼼하게 긁어냈다. 조그맣고 시커먼 덩어리가 툭 떨어졌다. 그것은, 혼자서는 변도 제대로 볼 수 없게 된 한동떡의 오래 나오지 못해 딱딱하게 굳은 변이었다. 나는 홀린 듯 그 장면을 지켜보았고, 장센떡이 그런 나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순간 바람이 일어 늘어진 매화나무 인스타 팔로워 늘리기 한 가지가 장센떡의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가지에 촘촘히 맺힌 꽃망울에서 팝콘처럼 톡톡, 희디흰 매화꽃이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봄 햇살이 쏟아지고 있는데도 한동떡이나 장센떡의 실루엣은 달 없는 밤처럼 어두웠고, 매화꽃만이 햇살을 빨아들여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일평생 몸을 놀려 자손들 살아갈 논을 늘린 한동떡은 몇년 뒤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이의 고단한 일생을 아는 이는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내 엄마의 기억 속에서도 한동떡은 희미해지는 중이다. 누구의 삶이든 그렇게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생명의 이치, 억울할 것도 슬플 것도 없다. 그러나 나는 아직 미욱하여 무르익어 시드는 매화가 서럽기만 하다.
같은 동네에서 오래 같이 살았지만 나는 한동떡을 자주 보지 못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한동떡은 주로 논밭, 아니면 산에 있었고, 세월이 좀 흐른 뒤에는 집 밖 걸음을 잘 하지 않았다. 예전에 대보름날 밤이면 동네 논에서 달집을 태우곤 했다. 동네 사람 다 모인 흥겨운 자리에 종 출신인 한센 내외와 음전하기로 소문난 한동떡, 몸 약한 우리 엄마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를 무동 태운 채 아버지는 긴 다리로 겅중겅중 달집 주변을 뛰었다. 아버지의 걸음이 빚어낸 리듬은 흥겨웠고, 높이 솟은 보름달은 어쩐지 처연했다. 음전해서, 몸이 아파서, 종의 자손이라서 이 흥겨운 잔치에 끼지 못하는 한동떡과 엄마, 한센네의 삶이 처연하게 느껴진 탓이었을까?
음전한 한동떡은 엄마처럼 위가 약해 소화불량을 달고 살았다. 한동떡은 간혹 들에서 캔 약쑥의 생즙을 내 어린 손자에게 들려 보냈고, 엄마는 그 답례로 읍내 약방에서 사온 소다를 내게 들려 보냈다. 한동떡은 죽은 밤나무 가지처럼 버석하게 마른 데다 차디찬 손으로 기어이 내 손에 고구마나 콩깨잘, 곶감 같은 것을 들려 보냈다. 돈 주고 산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한동떡과 그 아들 장센 부부는 동전 한 푼 허투루 쓰지 않고 그악스럽게 인스타 팔로워 늘리기 일해 해마다 논을 불렸기 때문이다. 돈 주고 사는 것은 다 귀하디 귀한 시절이었다. 내 손에 들린 것을 볼 때마다 엄마는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당신 손주들이나 멕이제 멀라고…. 하기사 모도 빤듯하게 심는 양반잉게. 그 집 논은 삐뚠 것이 한나도 읎어야. 논두렁조차 반질반질흐당게.
휴학과 학사경고로 남보다 졸업이 일 년 반이나 늦어진 어느 날, 엄마가 한동떡 집으로 심부름을 보냈다. 뭘 갖다주라 했는데 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사립문을 들어서자 마루 끝에 한동떡이 엉덩이를 쳐든 기이한 자세로 엎드려 있고, 장센떡이 된 한센떡이 엉덩이 근처에 얼굴을 대고 있었다. 내 기척을 느낀 한동떡이 노인네라고는 믿을 수 없이 재빠른 동작으로 바지를 추켜올렸다. 늘 햇볕 속에서 일하느라 검은 땅처럼 그을린 한동떡의 얼굴이 검붉게 달아올랐다. 언제나처럼 단정하게 마루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으며 한동떡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가 추접스런 꼴을 보였네이. 늙으먼 죽어야 허는디….
한센떡, 장센떡
산목숨인디 워쩔 것이냐, 살아야제
나의 첫 할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늙은 한동떡이 절대 바깥 걸음을 하지 않았던 이유를. 한동떡은 죽지도 않고 늙어가는 것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한동떡은 왜 왔냐고 묻지 않았고, 나는 뜰방에 우두커니 선 채 왜 왔다고 말하지 않았다. 장센떡이 가만히 몸을 일으켜 수돗가로 갔다. 쭈그려 앉은 그이는 비누로 손을 씻더니 몸을 돌려 확독(돌확) 위에 있던 무언가를 꺼냈는데, 가만 보니 짙푸른 탱자나무 가시였다. 그이는 가시로 검지 손톱 밑을 꼼꼼하게 긁어냈다. 조그맣고 시커먼 덩어리가 툭 떨어졌다. 그것은, 혼자서는 변도 제대로 볼 수 없게 된 한동떡의 오래 나오지 못해 딱딱하게 굳은 변이었다. 나는 홀린 듯 그 장면을 지켜보았고, 장센떡이 그런 나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순간 바람이 일어 늘어진 매화나무 인스타 팔로워 늘리기 한 가지가 장센떡의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가지에 촘촘히 맺힌 꽃망울에서 팝콘처럼 톡톡, 희디흰 매화꽃이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봄 햇살이 쏟아지고 있는데도 한동떡이나 장센떡의 실루엣은 달 없는 밤처럼 어두웠고, 매화꽃만이 햇살을 빨아들여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일평생 몸을 놀려 자손들 살아갈 논을 늘린 한동떡은 몇년 뒤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이의 고단한 일생을 아는 이는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내 엄마의 기억 속에서도 한동떡은 희미해지는 중이다. 누구의 삶이든 그렇게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생명의 이치, 억울할 것도 슬플 것도 없다. 그러나 나는 아직 미욱하여 무르익어 시드는 매화가 서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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