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치된 고통…참사 희생자의 아들은 왜 30년 뒤 감옥에 갇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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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행복한 댓글 0건 조회 6회 작성일 24-04-17 03:52본문
좁은 구치소 안에서 장모씨(56)는 자주 편지나 일기를 썼다. 불을 끄는 시간이 되면 철창 사이로 들어오는 빛에 의지해 글을 적어 내려갔다. 인스타 팔로워 구매
세상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싶다. 배 중량 초과로 인해 배가 침몰하고 말았다. 사람과 함께, 292명. 안전점검 미흡. 무리한 운항. 안전불감증. 인원수 초과. 아버지께서는 구명조끼만 입으셨어도 살아있으셨을 텐데. 위도에 가면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약을 꾸준히 먹고 있는데, 좋아지는지 모르겠다. 기분이 좋아졌다가 나빠졌다가 감정 기복이 심하다. 아파트 주민 여러분께 소란 피운 점 송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2023년 8월1일, 변호사님께)
장씨는 방화 혐의로 지난해 4월 구속됐다. 거주하던 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 비상계단에서 상자를 태웠다. 스스로 불을 끄고 떠나 별다른 피해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경찰은 구속 수사로 전환했다. 경찰은 장씨에게 정신 질환이 있어 ‘재범 위험’이 높다고 판단했다. 이전에 비슷한 신고가 있었다는 점도 문제가 됐다. 그는 두달 전 아파트 놀이터에서도 지폐 한 장과 책 한 권을 태운 적이 있었다. 항소심 법원은 지난달 14일 장씨에게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주된 혐의인 일반물건방화죄는 무죄로 인정됐다. 실형을 피했으나 장씨는 기쁘지 않았다. 그는 억울해서 울었다고 했다.
장씨는 왜 계속 물건을 태웠을까. 그는 언제 조현병 환자가 됐을까. 경향신문은 장씨 사건의 수사와 재판기록, 1·2심 판결문, 국립법무병원 정신감정서 등을 확보했다. 지난 3일에는 한차례 장씨와 만났다. 그의 삶에는 조현병 환자가 사법절차에서 겪는 어려움, 국가가 외면한 재난 피해자의 비극이 녹아 있다. 그는 빼앗긴 삶을 되돌려받고 싶다고 말한다.
장씨는 태우는 행위를 자기 학대라고 표현했다. 환청이 들렸어요. (놀이터에서 태운 건) 정신질환에 관한 책이었어요. 가지고 다니면서 자주 읽던 책인데…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사람이 죽으면 옷 같은 걸 태우잖아요. 그렇다고 불을 지르거나 누굴 해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그의 구속은 가족에게도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영장실질심사’ 같은 법률 용어를 처음 들었던 장씨의 동생(53)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형이 구속될 수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했어요. 경찰이 언질이라도 줬으면 당장이라도 형을 강제입원시켰을 거예요. 형은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지 처벌이 필요한 사람이 아닌데…병원에 갈 사람이 구치소를 간 거죠.
수사는 빠르게 진행됐다. 장씨는 지난해 4월26일 소환 통보를 받고 경찰에 출석했다가 유치장에 수감됐다. 다음날 충남 공주 국립법무병원에 유치돼 한 달간 정신감정을 받고, 이후에는 구치소로 옮겨져 줄곧 구속 상태로 재판받았다. 그렇게 6개월이 흘렀다.
형의 집행을 유예한다. 1심 재판을 맡은 서울중앙지법은 지난해 10월18일 장씨에게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일반방화·재물손괴 혐의 중 방화는 무죄로 봤다. 불을 피웠던 곳 주변에 불이 붙을만한 물건이 없었고, 태운 양도 많지 않았으며, 그가 불을 스스로 껐다는 점 등이 고려됐다. 법원은 정신질환이 없는 사람도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을 부각해 재범 위험이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도 했다.
징역 8개월 형이 유예됐으나 장씨는 웃을 수 없었다. 6개월을 구치소에서 보낸 터였다. 애초 수사기관은 구속영장을 청구하면서 주장한 현주건조물방화(사람이 있는 건물에 불 지름) 미수 혐의로는 기소조차 하지 못했다. 장씨 측 변호인은 수사기관에서 무리하게 혐의를 부풀려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조현병 환자에 대한 편견과 오해로 피고인이 사법절차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것 아닌지 세심히 살펴달라며 서울고법에 항소했으나 법원 판단은 바뀌지 않았다.
견뎌야 한다, 적응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장씨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상을 치르는 기분으로 구치소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장씨의 동생도 자꾸만 30년 전으로 소환되는 느낌이라고 했다. 30년 전 장씨의 아버지는 친구들과 낚시를 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1993년 10월10일 오전, 전북 부안군 위도에서 여객선 서해훼리호가 침몰한 날이었다. 362명의 승객 중 292명이 사망하는 대형 참사였다. 장씨와 가족들은 군산종합체육관에서 일주일을 기다려 시신을 수습했다.
장씨는 아버지 시신을 마주하던 장면을 생생히 기억한다. 보자마자 동생은 고개를 돌렸어요. 시신에 눈동자가 없었어요. 무서운데 노려봤어요. 어머니가 보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참사의 원인으로 화물 과적과 승선 인원 초과 운동 등이 지목됐다. 전형적인 ‘후진국형 인재’라는 비판이 잇따랐다. 221명이 정원인 훼리호에는 승객 355명과 선원 7명, 총 362명이 탑승했다. 15ℓ짜리 새우액젓 600여 통, 자갈 7.3t, 낚시도구 등 화물도 규정을 어겨가며 실었다. 배의 무게중심보다 위쪽에 화물을 실어 복원력이 약해진 상태였다. 바람이 심하고 파도가 거칠었으나 인스타 팔로워 구매 배를 그대로 운항했다. 규정을 무시하는 회사, 관리·감독을 하지 않는 관청, 재난 대처의 미숙함이 총체적으로 반영된 사고였다.
당시 참사 유가족들 500여명은 군산종합체육관 앞 4차선 도로를 점거하고 당국의 안일한 수습 태도로 시신 인양이 늦어지고 있다며 농성을 이어갔다. 장씨의 가족도 참사 이후 한 달간 서울 종로에 있던 해운항만청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정부가 제안한 보상안은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이 없다는 전제로 산정된 터였다. 이후 일부 유족들이 제기한 민사소송에서 국가의 과실이 인정됐다. 국가는 30년 전에도 책임을 인정하거나 유가족을 보듬지 못했다. 장씨의 동생은 당시만 해도 참사 유족에 대한 트라우마 치료 같은 개념 자체가 없었다며 그날의 사고는 과거형일 수 없다고 말했다.
책임감과 그리움은 장씨를 짓눌렀다. 밝은 성격을 지녀 ‘해바라기’라 불렸던 장씨는 그날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국립법무병원 정신감정서에는 아버지가 침몰 사고로 사망한 이후 가족들은 모두 심리적으로 힘들어했으며, 특히 피감정인의 상심이 컸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 사망 이후 종일 울기도 하고,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혼자만 있으려고 다락방에 올라가 있기도 했다고 한다고 적혀 있다.
장씨는 둑이 무너진 느낌이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저한테 너무 큰 존재였어요. 마음속에서 뭔가가 확 무너진 느낌. 그 뒤로는 사람들이 무서웠어요.
꾸준히 치료를 받을 때는 상태가 나아지기도 했다. ‘일’을 하고 있을 때는 특히 그랬다. 그러나 상시로 초조함과 불안감에 시달리는 탓에 어떤 일이든 오래 이어가지 못했다. 몇 년 전 큰맘 먹고 열었던 무인 빨래방이 폐업한 후에는 증상이 더 악화됐다. 그는 매일 출·퇴근하는 삶을 멋진 삶이라고 표현한다. 같은 시간에 일하고, 먹고, 자고. 얼마나 멋진 삶이에요. 평범하게 사는 게 가장 힘들더라고요.
장맛비가 내리던 2023년 7월17일 장씨는 구치소에서 동생에게 이렇게 썼다.
내 탓이다. 내 탓이다. 아무 생각 없이 세월을 보내려 하니 지옥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어. 아무 탈 없이 무사히 출소하기를 바라면서. 법을 어기고 들어와 있는 내가 과연 왜 그렇게 행동을 했는지, 다시금 생각해본다. 산만하고, 어수선하게 살아왔던 지난날을 후회하고 원망하면서. 아무런 사고 없이 이 무더위와 장마를 지났으면 하는 마음으로 기도해 본다.
세상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싶다. 배 중량 초과로 인해 배가 침몰하고 말았다. 사람과 함께, 292명. 안전점검 미흡. 무리한 운항. 안전불감증. 인원수 초과. 아버지께서는 구명조끼만 입으셨어도 살아있으셨을 텐데. 위도에 가면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약을 꾸준히 먹고 있는데, 좋아지는지 모르겠다. 기분이 좋아졌다가 나빠졌다가 감정 기복이 심하다. 아파트 주민 여러분께 소란 피운 점 송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2023년 8월1일, 변호사님께)
장씨는 방화 혐의로 지난해 4월 구속됐다. 거주하던 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 비상계단에서 상자를 태웠다. 스스로 불을 끄고 떠나 별다른 피해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경찰은 구속 수사로 전환했다. 경찰은 장씨에게 정신 질환이 있어 ‘재범 위험’이 높다고 판단했다. 이전에 비슷한 신고가 있었다는 점도 문제가 됐다. 그는 두달 전 아파트 놀이터에서도 지폐 한 장과 책 한 권을 태운 적이 있었다. 항소심 법원은 지난달 14일 장씨에게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주된 혐의인 일반물건방화죄는 무죄로 인정됐다. 실형을 피했으나 장씨는 기쁘지 않았다. 그는 억울해서 울었다고 했다.
장씨는 왜 계속 물건을 태웠을까. 그는 언제 조현병 환자가 됐을까. 경향신문은 장씨 사건의 수사와 재판기록, 1·2심 판결문, 국립법무병원 정신감정서 등을 확보했다. 지난 3일에는 한차례 장씨와 만났다. 그의 삶에는 조현병 환자가 사법절차에서 겪는 어려움, 국가가 외면한 재난 피해자의 비극이 녹아 있다. 그는 빼앗긴 삶을 되돌려받고 싶다고 말한다.
장씨는 태우는 행위를 자기 학대라고 표현했다. 환청이 들렸어요. (놀이터에서 태운 건) 정신질환에 관한 책이었어요. 가지고 다니면서 자주 읽던 책인데…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사람이 죽으면 옷 같은 걸 태우잖아요. 그렇다고 불을 지르거나 누굴 해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그의 구속은 가족에게도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영장실질심사’ 같은 법률 용어를 처음 들었던 장씨의 동생(53)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형이 구속될 수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했어요. 경찰이 언질이라도 줬으면 당장이라도 형을 강제입원시켰을 거예요. 형은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지 처벌이 필요한 사람이 아닌데…병원에 갈 사람이 구치소를 간 거죠.
수사는 빠르게 진행됐다. 장씨는 지난해 4월26일 소환 통보를 받고 경찰에 출석했다가 유치장에 수감됐다. 다음날 충남 공주 국립법무병원에 유치돼 한 달간 정신감정을 받고, 이후에는 구치소로 옮겨져 줄곧 구속 상태로 재판받았다. 그렇게 6개월이 흘렀다.
형의 집행을 유예한다. 1심 재판을 맡은 서울중앙지법은 지난해 10월18일 장씨에게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일반방화·재물손괴 혐의 중 방화는 무죄로 봤다. 불을 피웠던 곳 주변에 불이 붙을만한 물건이 없었고, 태운 양도 많지 않았으며, 그가 불을 스스로 껐다는 점 등이 고려됐다. 법원은 정신질환이 없는 사람도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을 부각해 재범 위험이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도 했다.
징역 8개월 형이 유예됐으나 장씨는 웃을 수 없었다. 6개월을 구치소에서 보낸 터였다. 애초 수사기관은 구속영장을 청구하면서 주장한 현주건조물방화(사람이 있는 건물에 불 지름) 미수 혐의로는 기소조차 하지 못했다. 장씨 측 변호인은 수사기관에서 무리하게 혐의를 부풀려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조현병 환자에 대한 편견과 오해로 피고인이 사법절차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것 아닌지 세심히 살펴달라며 서울고법에 항소했으나 법원 판단은 바뀌지 않았다.
견뎌야 한다, 적응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장씨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상을 치르는 기분으로 구치소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장씨의 동생도 자꾸만 30년 전으로 소환되는 느낌이라고 했다. 30년 전 장씨의 아버지는 친구들과 낚시를 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1993년 10월10일 오전, 전북 부안군 위도에서 여객선 서해훼리호가 침몰한 날이었다. 362명의 승객 중 292명이 사망하는 대형 참사였다. 장씨와 가족들은 군산종합체육관에서 일주일을 기다려 시신을 수습했다.
장씨는 아버지 시신을 마주하던 장면을 생생히 기억한다. 보자마자 동생은 고개를 돌렸어요. 시신에 눈동자가 없었어요. 무서운데 노려봤어요. 어머니가 보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참사의 원인으로 화물 과적과 승선 인원 초과 운동 등이 지목됐다. 전형적인 ‘후진국형 인재’라는 비판이 잇따랐다. 221명이 정원인 훼리호에는 승객 355명과 선원 7명, 총 362명이 탑승했다. 15ℓ짜리 새우액젓 600여 통, 자갈 7.3t, 낚시도구 등 화물도 규정을 어겨가며 실었다. 배의 무게중심보다 위쪽에 화물을 실어 복원력이 약해진 상태였다. 바람이 심하고 파도가 거칠었으나 인스타 팔로워 구매 배를 그대로 운항했다. 규정을 무시하는 회사, 관리·감독을 하지 않는 관청, 재난 대처의 미숙함이 총체적으로 반영된 사고였다.
당시 참사 유가족들 500여명은 군산종합체육관 앞 4차선 도로를 점거하고 당국의 안일한 수습 태도로 시신 인양이 늦어지고 있다며 농성을 이어갔다. 장씨의 가족도 참사 이후 한 달간 서울 종로에 있던 해운항만청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정부가 제안한 보상안은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이 없다는 전제로 산정된 터였다. 이후 일부 유족들이 제기한 민사소송에서 국가의 과실이 인정됐다. 국가는 30년 전에도 책임을 인정하거나 유가족을 보듬지 못했다. 장씨의 동생은 당시만 해도 참사 유족에 대한 트라우마 치료 같은 개념 자체가 없었다며 그날의 사고는 과거형일 수 없다고 말했다.
책임감과 그리움은 장씨를 짓눌렀다. 밝은 성격을 지녀 ‘해바라기’라 불렸던 장씨는 그날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국립법무병원 정신감정서에는 아버지가 침몰 사고로 사망한 이후 가족들은 모두 심리적으로 힘들어했으며, 특히 피감정인의 상심이 컸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 사망 이후 종일 울기도 하고,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혼자만 있으려고 다락방에 올라가 있기도 했다고 한다고 적혀 있다.
장씨는 둑이 무너진 느낌이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저한테 너무 큰 존재였어요. 마음속에서 뭔가가 확 무너진 느낌. 그 뒤로는 사람들이 무서웠어요.
꾸준히 치료를 받을 때는 상태가 나아지기도 했다. ‘일’을 하고 있을 때는 특히 그랬다. 그러나 상시로 초조함과 불안감에 시달리는 탓에 어떤 일이든 오래 이어가지 못했다. 몇 년 전 큰맘 먹고 열었던 무인 빨래방이 폐업한 후에는 증상이 더 악화됐다. 그는 매일 출·퇴근하는 삶을 멋진 삶이라고 표현한다. 같은 시간에 일하고, 먹고, 자고. 얼마나 멋진 삶이에요. 평범하게 사는 게 가장 힘들더라고요.
장맛비가 내리던 2023년 7월17일 장씨는 구치소에서 동생에게 이렇게 썼다.
내 탓이다. 내 탓이다. 아무 생각 없이 세월을 보내려 하니 지옥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어. 아무 탈 없이 무사히 출소하기를 바라면서. 법을 어기고 들어와 있는 내가 과연 왜 그렇게 행동을 했는지, 다시금 생각해본다. 산만하고, 어수선하게 살아왔던 지난날을 후회하고 원망하면서. 아무런 사고 없이 이 무더위와 장마를 지났으면 하는 마음으로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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