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청춘’ 넘어, ‘70대 재벌가 여성’의 욕망… 박상영의 ‘새로운 챕터’ [플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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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행복한 댓글 0건 조회 4회 작성일 26-07-24 15:53본문
소설가 박상영이 5년 만에 내놓은 장편 <지푸라기 왕관을 쓴 여자>(래빗홀)는 그가 지금까지 써왔던 작품들과 결을 달리한다. 주인공은 이 시대의 평범한 청춘이 아니라 노회한 재벌 여성이다. 분노와 욕망으로 점철된 그의 삶과 관련한 비밀이 현대 한국 경제사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의 한 북카페에서 박상영을 만났다. 올해로 등단 10년을 맞은 그는 이번 작품을 자신의 “새로운 챕터를 준비하는 소설”이라고 소개했다. “문학계에 몇 없는 ‘MBTI’ E(외향적) 성향 작가”라고 본인을 소개한 만큼, 그는 책 소개도 자주 웃으며 즐겁게 했다.
소설은 자이니치 여성인 마츠노 하나가 자신의 어머니 마츠노 사치코의 죽음과 관련된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하나는 한국에서 기자로 일하는 맹준호를 만난다.
총 3부로 구성된 소설에서 1부는 하나와 준호가 한국에서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인물들을 차례로 추적하는 내용으로 전형적인 추리소설의 면모를 갖췄다. 초반 독자의 흥미를 붙들어놓기에 좋은 선택으로 보인다.
“전작을 모두 읽은 첫 소설이 해문출판사에서 나온 80권짜리 애거사 크리스티 전집”이었다는 박상영은 개인적으로 추리소설을 좋아한다. 그는 마쓰모토 세이초, 미야베 미유키의 팬이다. 하지만 이번 소설을 쓸 때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1부다. 그는 “1부는 도입이었고 장르적으로 써야 하는데, (추리 장르가) 처음이다 보니 힘들었다. 많이 고쳤다”며 “진짜 쓰고 싶었던 이야기는 2부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2부를 넘어가면서는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사치코와 윤동주, 두 여성의 젊은 시절 이야기가 펼쳐진다. 1970~1990년대 한국 경제성장기 재벌기업의 권력 투쟁이 윤동주를 중심으로 한 여성 중심 서사로 펼쳐진다.
그는 “그간 동시대 젊은이들의 사랑과 직업 생활의 애환 이런 걸 다뤘고 주인공도 남성이 대부분이었다면, 이번엔 내가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며 “윤동주는 1950년대 태어나 전쟁을 겪은 최상류층 여성이었으니 나에겐 큰 도전이었다”고 했다.
주인공 중 한 명을 자이니치로 설정한 것과 관련해서는 “피해자이자 탐정 역할을 수행하는 캐릭터가 비밀과 같은 사건으로 인해 억지로 이주해온 사람이라면 그녀의 삶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생각하다가 자이니치를 떠올렸다”며 “재외동포나 이주민 문제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책 시작에 앞서 ‘이 작품은 허구’라는 알림이 있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관련해 어쩔 수 없이 현실의 몇몇 기업이 떠오른다. 작가는 자신과는 생소한 이번 작품의 배경 설정을 위해 재벌 관계자 등 여러 분야의 사람을 만나며 취재했다. 한국 재벌사를 다룬 책도 여럿 읽었다.
윤동주의 말투는 특히나 문어체에 가까운데, 그는 “50년대에 태어나 교육을 많이 받은 할머니들이 말할 때도 문어체로 얘기하고 한자어도 많이 쓰신다는 걸 반영해 동주의 말투를 구성했다. 엄앵란 선생님이 주연한 영화의 배역 같다고나 할까”라고 했다.
IMF 외환위기 등 한국 근현대를 흔든 굵직한 경제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면서 인물의 고뇌와 갈등을 그린다는 점에서 최근 인기를 끈 시리즈물 <재벌집 막내아들> <메이드 인 코리아> 등이 떠오른다. 남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들 드라마와 달리 <지푸라기 왕관을 쓴 여자>는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소설을 읽으면서도 한 편의 드라마 같다는 인상이 든다. 실제 출간 전부터 영상화 문의가 이어져 현재 협의 중이라고 한다.
전작 <대도시의 사랑법>은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졌고, 드라마 대본은 그가 집필을 맡았다. 현재 전작 <믿음에 대하여> 역시 영상화를 앞두고 직접 각본 작업 중이다. 박상영은 소설가로 등단한 해에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실시한 웹드라마 극본 공모전에서 당선된 이력도 있다.
2016년 문학동네신인상에 단편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가 당선돼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연작소설 <대도시의 사랑법>으로 2022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2023년 국제 더블린문학상, 2024년 메디치상 후보에 올랐다.
그는 “과거엔 ‘내 책이 어떻게 해외에 가나’ 생각했는데, 부커상 후보에 오르고 2023년부터 지난해까지 15개국 정도를 다녀왔다. 뭔가 자격증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면서 “당연히 해외 문학상(수상)에 대한 생각이 없었는데, 계속 후보에만 오르니까 사람 마음이 또 짜증이 나더라”며 웃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후보가 최고 경력이면 속상할 거 같은데, 또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자고 되뇌고 있다”고 말했다.
차기작은 지난해 계간 문학동네 가을호에 내놨던 중편 ‘복숭아 통조림, 기억의 무게’를 장편으로 개작한 작품으로 오는 8월부터 계간 창비에서 연재할 예정이다.
▼ 고희진 기자 gojin@khan.kr
최근 KTX 복선화 건설현장에서 발생한 미얀마 출신의 젊은 이주노동자 아웅민우씨의 죽음은 여전히 위험의 외주화가 질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당신의 죽음이 아닌, 사회 깊숙이 은폐된, 나와는 무관한 그들의 죽음이 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다. 한국인 노동자 사망률의 3배가 넘는 이주노동자들의 죽음 앞에서 과연 그들은 우리의 이웃인지 의문이 든다. 타국에 홀로 와서 비참하게 숨을 거둔 시신은 가족이 오기 전까지 망자에 대한 최소한의 의례도 없이 냉동고 속에 방치된다. 어찌 이토록 비정한가.
그들은 현대판 노예나 다름없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1965년 유엔총회가 채택하고 1978년 한국도 가입한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 철폐에 관한 국제협약’, 1990년 ‘모든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에 관한 국제협약’, 2016년 ‘난민과 이주자를 위한 뉴욕 선언’이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고 이주노동자의 삶을 보호하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저 협약이고 선언일 뿐 그들을 대하는 구체적인 정책은 각국이 알아서 한다.
국가는 외국자본에는 규제 완화나 세제 혜택을 아낌없이 베풀면서 이주노동자에게는 각종 자격을 요구하고 고용 제한을 가한다. 임금으로 포섭된 그들을 감시와 단속, 처벌로 노동시장의 수요를 적절히 채워주며, 각종 체류자격 제도를 통해 노동력을 극대화시킨다. 노동시장이 양극화나 계층화할수록 이주민은 하층부로 전락한다. 고용한 국가의 안방을 온몸으로 쓸고 닦으며, 더럽고 악취 나는 고된 노동을 대신함에도 자국의 일자리를 빼앗아간다며 비난하는 극우파의 정치적 동력으로 이용된다. 심지어 한국에서는 “야, 이 ×끼야”로 호명되는 그들은 이름조차 없다.
18~19세기 프랑스혁명과 민족주의의 발흥 속에서 국경을 죄고, 언어를 통일하며, 국민의 정체성을 각인한 상상의 공동체인 국가가 형성됐다. 그런 국민국가의 부국강병에 이바지한 자본은 이제는 국가를 지배해 이주민의 노동환경마저 설계하게 한다. 그들을 상대로 차별과 동화, 편입과 통합 등의 정책이 펼쳐진다. 국법과 치안은 자본의 요구를 충실히 반영한다. 노동자의 표로 권좌에 올라선 정치가들은 자본 앞에서는 90도로 고개를 숙인다. 자본은 국가의 통제마저 뛰어넘는 무정부 자본주의를 추구한다. 아나키즘과 흡사하다. 그러나 자본은 자신에 대한 부정은 물론 불평등과 착취를 거부하는 아나키즘과는 대척점에 서 있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대와 협동을 통한 평등사회를 지향하는 그 세계는 이주노동자가 끝내 죽어야만 이뤄지는 꿈이다.
생각해보라. 400만년 전 인류의 조상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등장 이래 이주의 역사가 멈춘 적이 있었던가. 이주는 모든 국가의 토대다. 허나 원초적 본능인 노마드(유목민)의 삶을 가둘 수는 없다. 디지털 노마드는 하루에도 수없이 국경을 넘나든다. 인류의 사상과 철학, 지식과 정보는 인공지능 발명 이전부터 국경을 넘나들었다. 산업연수생이니 고용허가제니 하는 제약도 없다. 오직 몸을 가진 인간만이 국경에서 검문받아야 한다. 성자들인 석가와 예수도 살아 있다면 검문을 당해야 한다. 그들도 잉여가치를 생산할 노동력이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설사 통과해도 성소가 아닌 공장으로 가야 한다.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사막의 베두인족은 자신들의 거처를 방문하는 손님이 그 누구일지라도 극진히 환대한다. 그것은 곧 자신을 환대하는 것과 같다. 사막에서 길을 잃는 것은 곧 죽음이다. 베두인족 자신들도 언젠가는 사막에서 길을 잃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본의 바다에 언제 표류할지 모르는 존재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이주노동자들이 표류해올 때, 우리가 먼저 손을 잡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얼마 전까지도 우리 부모와 친척들은 머나먼 타국 땅에서 지금 우리의 처분 방식 그대로를 감내하며 살지 않았던가. 함께 사는 이주노동자들의 죽음의 행렬과 눈물을 멈추게 하는 것이야말로 환대의 첫걸음이 아닐까.
소설은 자이니치 여성인 마츠노 하나가 자신의 어머니 마츠노 사치코의 죽음과 관련된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하나는 한국에서 기자로 일하는 맹준호를 만난다.
총 3부로 구성된 소설에서 1부는 하나와 준호가 한국에서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인물들을 차례로 추적하는 내용으로 전형적인 추리소설의 면모를 갖췄다. 초반 독자의 흥미를 붙들어놓기에 좋은 선택으로 보인다.
“전작을 모두 읽은 첫 소설이 해문출판사에서 나온 80권짜리 애거사 크리스티 전집”이었다는 박상영은 개인적으로 추리소설을 좋아한다. 그는 마쓰모토 세이초, 미야베 미유키의 팬이다. 하지만 이번 소설을 쓸 때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1부다. 그는 “1부는 도입이었고 장르적으로 써야 하는데, (추리 장르가) 처음이다 보니 힘들었다. 많이 고쳤다”며 “진짜 쓰고 싶었던 이야기는 2부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2부를 넘어가면서는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사치코와 윤동주, 두 여성의 젊은 시절 이야기가 펼쳐진다. 1970~1990년대 한국 경제성장기 재벌기업의 권력 투쟁이 윤동주를 중심으로 한 여성 중심 서사로 펼쳐진다.
그는 “그간 동시대 젊은이들의 사랑과 직업 생활의 애환 이런 걸 다뤘고 주인공도 남성이 대부분이었다면, 이번엔 내가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며 “윤동주는 1950년대 태어나 전쟁을 겪은 최상류층 여성이었으니 나에겐 큰 도전이었다”고 했다.
주인공 중 한 명을 자이니치로 설정한 것과 관련해서는 “피해자이자 탐정 역할을 수행하는 캐릭터가 비밀과 같은 사건으로 인해 억지로 이주해온 사람이라면 그녀의 삶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생각하다가 자이니치를 떠올렸다”며 “재외동포나 이주민 문제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책 시작에 앞서 ‘이 작품은 허구’라는 알림이 있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관련해 어쩔 수 없이 현실의 몇몇 기업이 떠오른다. 작가는 자신과는 생소한 이번 작품의 배경 설정을 위해 재벌 관계자 등 여러 분야의 사람을 만나며 취재했다. 한국 재벌사를 다룬 책도 여럿 읽었다.
윤동주의 말투는 특히나 문어체에 가까운데, 그는 “50년대에 태어나 교육을 많이 받은 할머니들이 말할 때도 문어체로 얘기하고 한자어도 많이 쓰신다는 걸 반영해 동주의 말투를 구성했다. 엄앵란 선생님이 주연한 영화의 배역 같다고나 할까”라고 했다.
IMF 외환위기 등 한국 근현대를 흔든 굵직한 경제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면서 인물의 고뇌와 갈등을 그린다는 점에서 최근 인기를 끈 시리즈물 <재벌집 막내아들> <메이드 인 코리아> 등이 떠오른다. 남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들 드라마와 달리 <지푸라기 왕관을 쓴 여자>는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소설을 읽으면서도 한 편의 드라마 같다는 인상이 든다. 실제 출간 전부터 영상화 문의가 이어져 현재 협의 중이라고 한다.
전작 <대도시의 사랑법>은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졌고, 드라마 대본은 그가 집필을 맡았다. 현재 전작 <믿음에 대하여> 역시 영상화를 앞두고 직접 각본 작업 중이다. 박상영은 소설가로 등단한 해에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실시한 웹드라마 극본 공모전에서 당선된 이력도 있다.
2016년 문학동네신인상에 단편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가 당선돼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연작소설 <대도시의 사랑법>으로 2022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2023년 국제 더블린문학상, 2024년 메디치상 후보에 올랐다.
그는 “과거엔 ‘내 책이 어떻게 해외에 가나’ 생각했는데, 부커상 후보에 오르고 2023년부터 지난해까지 15개국 정도를 다녀왔다. 뭔가 자격증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면서 “당연히 해외 문학상(수상)에 대한 생각이 없었는데, 계속 후보에만 오르니까 사람 마음이 또 짜증이 나더라”며 웃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후보가 최고 경력이면 속상할 거 같은데, 또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자고 되뇌고 있다”고 말했다.
차기작은 지난해 계간 문학동네 가을호에 내놨던 중편 ‘복숭아 통조림, 기억의 무게’를 장편으로 개작한 작품으로 오는 8월부터 계간 창비에서 연재할 예정이다.
▼ 고희진 기자 gojin@khan.kr
최근 KTX 복선화 건설현장에서 발생한 미얀마 출신의 젊은 이주노동자 아웅민우씨의 죽음은 여전히 위험의 외주화가 질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당신의 죽음이 아닌, 사회 깊숙이 은폐된, 나와는 무관한 그들의 죽음이 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다. 한국인 노동자 사망률의 3배가 넘는 이주노동자들의 죽음 앞에서 과연 그들은 우리의 이웃인지 의문이 든다. 타국에 홀로 와서 비참하게 숨을 거둔 시신은 가족이 오기 전까지 망자에 대한 최소한의 의례도 없이 냉동고 속에 방치된다. 어찌 이토록 비정한가.
그들은 현대판 노예나 다름없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1965년 유엔총회가 채택하고 1978년 한국도 가입한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 철폐에 관한 국제협약’, 1990년 ‘모든 이주노동자와 그 가족의 권리에 관한 국제협약’, 2016년 ‘난민과 이주자를 위한 뉴욕 선언’이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고 이주노동자의 삶을 보호하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저 협약이고 선언일 뿐 그들을 대하는 구체적인 정책은 각국이 알아서 한다.
국가는 외국자본에는 규제 완화나 세제 혜택을 아낌없이 베풀면서 이주노동자에게는 각종 자격을 요구하고 고용 제한을 가한다. 임금으로 포섭된 그들을 감시와 단속, 처벌로 노동시장의 수요를 적절히 채워주며, 각종 체류자격 제도를 통해 노동력을 극대화시킨다. 노동시장이 양극화나 계층화할수록 이주민은 하층부로 전락한다. 고용한 국가의 안방을 온몸으로 쓸고 닦으며, 더럽고 악취 나는 고된 노동을 대신함에도 자국의 일자리를 빼앗아간다며 비난하는 극우파의 정치적 동력으로 이용된다. 심지어 한국에서는 “야, 이 ×끼야”로 호명되는 그들은 이름조차 없다.
18~19세기 프랑스혁명과 민족주의의 발흥 속에서 국경을 죄고, 언어를 통일하며, 국민의 정체성을 각인한 상상의 공동체인 국가가 형성됐다. 그런 국민국가의 부국강병에 이바지한 자본은 이제는 국가를 지배해 이주민의 노동환경마저 설계하게 한다. 그들을 상대로 차별과 동화, 편입과 통합 등의 정책이 펼쳐진다. 국법과 치안은 자본의 요구를 충실히 반영한다. 노동자의 표로 권좌에 올라선 정치가들은 자본 앞에서는 90도로 고개를 숙인다. 자본은 국가의 통제마저 뛰어넘는 무정부 자본주의를 추구한다. 아나키즘과 흡사하다. 그러나 자본은 자신에 대한 부정은 물론 불평등과 착취를 거부하는 아나키즘과는 대척점에 서 있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대와 협동을 통한 평등사회를 지향하는 그 세계는 이주노동자가 끝내 죽어야만 이뤄지는 꿈이다.
생각해보라. 400만년 전 인류의 조상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등장 이래 이주의 역사가 멈춘 적이 있었던가. 이주는 모든 국가의 토대다. 허나 원초적 본능인 노마드(유목민)의 삶을 가둘 수는 없다. 디지털 노마드는 하루에도 수없이 국경을 넘나든다. 인류의 사상과 철학, 지식과 정보는 인공지능 발명 이전부터 국경을 넘나들었다. 산업연수생이니 고용허가제니 하는 제약도 없다. 오직 몸을 가진 인간만이 국경에서 검문받아야 한다. 성자들인 석가와 예수도 살아 있다면 검문을 당해야 한다. 그들도 잉여가치를 생산할 노동력이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설사 통과해도 성소가 아닌 공장으로 가야 한다.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사막의 베두인족은 자신들의 거처를 방문하는 손님이 그 누구일지라도 극진히 환대한다. 그것은 곧 자신을 환대하는 것과 같다. 사막에서 길을 잃는 것은 곧 죽음이다. 베두인족 자신들도 언젠가는 사막에서 길을 잃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본의 바다에 언제 표류할지 모르는 존재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이주노동자들이 표류해올 때, 우리가 먼저 손을 잡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얼마 전까지도 우리 부모와 친척들은 머나먼 타국 땅에서 지금 우리의 처분 방식 그대로를 감내하며 살지 않았던가. 함께 사는 이주노동자들의 죽음의 행렬과 눈물을 멈추게 하는 것이야말로 환대의 첫걸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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