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소송 10년…법원 “롯데쇼핑·제조사, 6억 배상” 화해 권고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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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행복한 댓글 0건 조회 3회 작성일 26-07-26 06:00본문
법원이 가습기살균제를 판매한 롯데쇼핑과 제조사에 6억3000만원을 배상하라는 취지의 화해 권고 결정을 내렸다. 피해자 측이 소송을 제기한 지 10년 만이다.
21일 경향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3부(재판장 최종진)는 지난 20일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인 이모씨와 그 자녀가 가습기살균제 ‘와이즐렉’을 공급한 롯데쇼핑과 제조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조정 절차를 연 뒤 조정이 불성립하자 피해자들에게 6억3000만원을 공동 배상하라는 취지의 화해를 권고했다. 법원은 소송을 계속하는 것보다 화해하는 게 당사자에게 이익이 된다고 판단할 때 직권으로 화해 권고를 할 수 있다.
조정 절차에선 이씨 자녀가 가습기살균제로 인해 입은 신체적 장애 등에 대해 롯데쇼핑 등이 얼마나 배상해야 하는지가 쟁점이 됐다. 이씨 측은 2016년 5월 롯데쇼핑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이씨의 아내는 가습기살균제 사망 피해자이고, 당시 영아였던 자녀는 자라면서 만성 폐질환을 앓게 됐다. 이에 이씨는 아내 사망과 자녀의 폐질환 등에 대한 위자료와 손해배상을 롯데쇼핑과 제조사에 청구했다.
재판부는 앞서 2024년에도 한 차례 조정 절차를 밟았으나 불성립했다. 이후 올해 초까지 자녀의 폐질환이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한 신체 감정 등이 진행됐다. 감정 결과서가 모두 나오자 재판부는 지난 5월 판결을 선고하기로 했다가, 사건을 다시 조정에 부쳤다.
피해자와 업체 모두 화해 권고를 받아들이면 확정판결과 같은 효력이 생긴다. 다만 한쪽이라도 이의를 제기하면, 재판부는 정식 재판 절차를 거친 뒤 판결을 내야 한다. 노병용 전 롯데마트 대표는 2018년 대법원에서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 등으로 금고 3년형을 확정받았고 2019년 6월 만기 출소했다.
1994년부터 국내에서 판매된 가습기살균제 제품은 사용자들에게 폐 손상 등 대규모 피해를 줬다. 2011년 질병관리본부(현 질병관리청) 역학조사를 통해 가습기살균제와 폐 손상 간의 인과관계가 확인됐고, 2014년 당시 환경부가 피해 구제 절차를 시작했다.
대법원은 2024년 6월 가습기살균제 피해에 대한 국가 책임을 공식 인정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지난해부터 피해 구제 절차를 국가 주도 배상체계로 전면 전환하고 피해자들의 생애주기에 따른 피해배상을 위한 종합대책을 내놨다.
제23회 서울국제무용콩쿠르(집행위원장 허영일)에서 한국예술종합학교 정건세(사진)가 그랑프리를 차지했다. 서울국제문화교류회(이사장 김성재)가 주최·주관하고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예술위원회가 후원한 이번 콩쿠르에는 한국·중국·일본·러시아·미국 등 총 10개국 1259명(국내 509명, 해외 750명)이 참가했다.
참가자들은 지난 5월14일부터 6월1일까지 해외 및 국내 예선을 치렀으며, 7월10일부터 23일까지 서울 나루아트센터 대공연장에서 본선 경연을 펼쳤다.
발레, 컨템포러리 댄스, 민족춤, 안무 등 총 4개 부문 경연이 진행됐다. 전체 그랑프리 수상의 영예는 컨템포러리 댄스 시니어 남자 1위 정건세(한국예술종합학교 4학년)가 차지했다.
민족춤 전통 부문 주니어 1위는 이여원(국립전통예술고), 시니어 남자 1위는 칭신(베이징무용대), 민족춤 창작 부문 주니어 1위는 위안위양(중국 중앙민족대), 시니어 1위는 김성호(한양대)다.
컨템포러리 댄스 시니어 여자 1위엔 쉬톈후이(중국 선전가무극원)가 올랐으며 발레 시니어 남자 1위는 이진호(한국예술종합학교), 2위는 김호연, 시니어 여자 1위는 박하민(한국예술종합학교)이 차지했다.
이와 함께 전문 안무가 1위 선쉬광(중국 장난대), 젊은 안무가 1위 쩡바이성(중국 선전가무극원) 등 총 83명이 본상을 수상했다.
허영일 집행위원장은 “올해는 국내외에서 1259명이 참가해 참신한 무용 신예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오래전 나는 현장인문학에 적극적이었다. 현장인문학은 삶에 필요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도덕적 자원을 많이 갖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과 인문학을 공부하는 프로그램이다. 주로 내가 강의했던 곳은 교도소와 야학이었다. 책은 어디서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읽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읽힌다는 것을 여기서 체험했다. 이를테면 루쉰의 <철방에 잠든 사람들>을 교도소에서 읽는 것과 대학에서 읽는 것은 완전히 다른 감응을 불러일으킨다.
당시 나는 대학수업과 현장인문학을 자주 비교했다. 둘은 앎을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방식에서 크게 달랐다. 나는 둘의 차이를 ‘앎을 참조하는 앎’과 ‘삶을 참조하는 앎’이라는 말로 표현한 적이 있다. 대학이나 연구자집단에서 강의하거나 발표할 때 청중은 어떤 학자의 이론이나 개념을 떠올리고 내 주장과 그것을 관련지어 물을 때가 많았다. 기존 지식을 참조하고 비교하면서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앎의 회로 안에서 하나의 앎이 다른 앎을 가리키는, 자기 지시 형태의 앎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의 갈등·고통 등 감정 지운 채문장의 조합으로 만든 AI 글쓰기‘앎만 참조하는 앎’이 계속되면서삶에 무력한 문장들만 쌓여간다
그런데 현장인문학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렇게 묻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이들의 가방끈이 짧은 사정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뭔가를 물을 때 이들은 대체로 자신의 삶을 참조했다. “예전에 내게 이런 일이 있었어요.” 그러다보면 수업은 곧잘 인생 상담으로 흘러갔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예요?” 어떤 재소자는 의사도 아닌 내게 어딘가 아프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앎을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방식도 그랬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앎의 획득이 머리카락을 자르거나 말투를 바꾸는 등 신체나 행동의 변화로 나타나는 일이 많았다.
물론 ‘앎을 참조하는 앎’과 ‘삶을 참조하는 앎’의 구분은 상대적인 것이다. 누구에게나 앎과 삶은 직물을 짜는 씨실과 날실처럼 교차한다. 나처럼 읽고 쓰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도 삶에 대한 참조 없이 읽기와 쓰기가 진행되지는 않는다. 책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삶의 페이지를 되넘기는 일이 무의식적으로 계속 일어난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문장들은 내 삶의 어떤 일들을 격렬히 껴안은 후에야 생기를 얻는다. 그래서 커다란 기쁨으로 마무리될 때조차 읽기와 쓰기는 사람을 지쳐 쓰러지게 만든다. 읽기와 쓰기 모두 겪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해 대학 강의를 하다가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사건을 만났다. 한 학생이 몸이 아파 중간시험을 응시하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 책 한 권을 지정해주고 그 내용을 요약한 뒤 자유롭게 비평해보라는 과제를 냈다. 그가 제출한 독후감은 전체적으로 매끄럽고 깔끔했다. 하지만 정장 입고 놀이공원에 온 사람처럼 어딘가 어색했다. 문장들을 하나씩 살펴보니 문제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직접 인용한 문장들은 책에 있는 정확한 문장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저자 이름을 엉뚱하게 썼다(참고로 책의 저자는 나였다). AI가 작성한 글이었다. 읽지도 않고 쓰지도 않았는데 독후감이 나왔다. 겪지도 않은 일에 대한 보고서였던 셈이다(그가 이용한 거대언어모델 AI도 독자나 저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텍스트를 추출하고 합성했을 뿐이다).
지난달 배재고등학교 야구부 학생들이 ‘5·18민주화운동’을 폄훼하고 조롱하는 응원 구호를 외친 것 때문에 학교 측에서 사과문을 게재했는데 AI로 작성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할 때 겪게 되는 온갖 감정들을 겪지 않은 채 사과문이 나온 셈이다. 사과의 감정과 무관하게 작성된 사과문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오래전 현장인문학이 내게 준 가르침은 앎만을 참조하는 앎을 경계하라는 것이었다. 삶과 무관한 앎은 삶을 참조하고 삶으로 구현할 때의 갈등과 고통을 제거해주지만 그만큼 삶에 무력한 것이다. 그런데 AI 시대의 앎, AI 시대의 읽기와 쓰기는 이런 경향의 끝판왕처럼 보인다. 삶을 참조하는 일은 고사하고, 앎의 생산 과정조차 체험하지 않게 만든다. 읽지도 않은 읽기, 쓰지도 않은 쓰기의 결과물들이 깔끔한 정장을 입고 곳곳에 등장한다.
니체는 “피로 쓴 글만을 사랑한다”며 “글을 쓰려면 피로 쓰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지식, 우리 시대의 문장들에는 피의 공급이 급감하고 있다. 글을 쓸 때 피를 흘리는 사람도, 글을 읽을 때 피 냄새를 맡는 사람도 사라져가고 있다. 피의 공급 없이, 핏물이 다 빠진 문장들을 조합하고 재조합해서 만들어낸 생성형 문장들이 퇴적되고 있을 뿐이다. 피가 끊겼으니 썩을 일만 남은 것일까. 생성이 부패였던가. 삶에 무의미한 문장들이 이제 산더미가 되었다.
21일 경향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3부(재판장 최종진)는 지난 20일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인 이모씨와 그 자녀가 가습기살균제 ‘와이즐렉’을 공급한 롯데쇼핑과 제조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조정 절차를 연 뒤 조정이 불성립하자 피해자들에게 6억3000만원을 공동 배상하라는 취지의 화해를 권고했다. 법원은 소송을 계속하는 것보다 화해하는 게 당사자에게 이익이 된다고 판단할 때 직권으로 화해 권고를 할 수 있다.
조정 절차에선 이씨 자녀가 가습기살균제로 인해 입은 신체적 장애 등에 대해 롯데쇼핑 등이 얼마나 배상해야 하는지가 쟁점이 됐다. 이씨 측은 2016년 5월 롯데쇼핑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이씨의 아내는 가습기살균제 사망 피해자이고, 당시 영아였던 자녀는 자라면서 만성 폐질환을 앓게 됐다. 이에 이씨는 아내 사망과 자녀의 폐질환 등에 대한 위자료와 손해배상을 롯데쇼핑과 제조사에 청구했다.
재판부는 앞서 2024년에도 한 차례 조정 절차를 밟았으나 불성립했다. 이후 올해 초까지 자녀의 폐질환이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한 신체 감정 등이 진행됐다. 감정 결과서가 모두 나오자 재판부는 지난 5월 판결을 선고하기로 했다가, 사건을 다시 조정에 부쳤다.
피해자와 업체 모두 화해 권고를 받아들이면 확정판결과 같은 효력이 생긴다. 다만 한쪽이라도 이의를 제기하면, 재판부는 정식 재판 절차를 거친 뒤 판결을 내야 한다. 노병용 전 롯데마트 대표는 2018년 대법원에서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 등으로 금고 3년형을 확정받았고 2019년 6월 만기 출소했다.
1994년부터 국내에서 판매된 가습기살균제 제품은 사용자들에게 폐 손상 등 대규모 피해를 줬다. 2011년 질병관리본부(현 질병관리청) 역학조사를 통해 가습기살균제와 폐 손상 간의 인과관계가 확인됐고, 2014년 당시 환경부가 피해 구제 절차를 시작했다.
대법원은 2024년 6월 가습기살균제 피해에 대한 국가 책임을 공식 인정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지난해부터 피해 구제 절차를 국가 주도 배상체계로 전면 전환하고 피해자들의 생애주기에 따른 피해배상을 위한 종합대책을 내놨다.
제23회 서울국제무용콩쿠르(집행위원장 허영일)에서 한국예술종합학교 정건세(사진)가 그랑프리를 차지했다. 서울국제문화교류회(이사장 김성재)가 주최·주관하고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예술위원회가 후원한 이번 콩쿠르에는 한국·중국·일본·러시아·미국 등 총 10개국 1259명(국내 509명, 해외 750명)이 참가했다.
참가자들은 지난 5월14일부터 6월1일까지 해외 및 국내 예선을 치렀으며, 7월10일부터 23일까지 서울 나루아트센터 대공연장에서 본선 경연을 펼쳤다.
발레, 컨템포러리 댄스, 민족춤, 안무 등 총 4개 부문 경연이 진행됐다. 전체 그랑프리 수상의 영예는 컨템포러리 댄스 시니어 남자 1위 정건세(한국예술종합학교 4학년)가 차지했다.
민족춤 전통 부문 주니어 1위는 이여원(국립전통예술고), 시니어 남자 1위는 칭신(베이징무용대), 민족춤 창작 부문 주니어 1위는 위안위양(중국 중앙민족대), 시니어 1위는 김성호(한양대)다.
컨템포러리 댄스 시니어 여자 1위엔 쉬톈후이(중국 선전가무극원)가 올랐으며 발레 시니어 남자 1위는 이진호(한국예술종합학교), 2위는 김호연, 시니어 여자 1위는 박하민(한국예술종합학교)이 차지했다.
이와 함께 전문 안무가 1위 선쉬광(중국 장난대), 젊은 안무가 1위 쩡바이성(중국 선전가무극원) 등 총 83명이 본상을 수상했다.
허영일 집행위원장은 “올해는 국내외에서 1259명이 참가해 참신한 무용 신예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오래전 나는 현장인문학에 적극적이었다. 현장인문학은 삶에 필요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도덕적 자원을 많이 갖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과 인문학을 공부하는 프로그램이다. 주로 내가 강의했던 곳은 교도소와 야학이었다. 책은 어디서 누구와 어떤 방식으로 읽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읽힌다는 것을 여기서 체험했다. 이를테면 루쉰의 <철방에 잠든 사람들>을 교도소에서 읽는 것과 대학에서 읽는 것은 완전히 다른 감응을 불러일으킨다.
당시 나는 대학수업과 현장인문학을 자주 비교했다. 둘은 앎을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방식에서 크게 달랐다. 나는 둘의 차이를 ‘앎을 참조하는 앎’과 ‘삶을 참조하는 앎’이라는 말로 표현한 적이 있다. 대학이나 연구자집단에서 강의하거나 발표할 때 청중은 어떤 학자의 이론이나 개념을 떠올리고 내 주장과 그것을 관련지어 물을 때가 많았다. 기존 지식을 참조하고 비교하면서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앎의 회로 안에서 하나의 앎이 다른 앎을 가리키는, 자기 지시 형태의 앎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의 갈등·고통 등 감정 지운 채문장의 조합으로 만든 AI 글쓰기‘앎만 참조하는 앎’이 계속되면서삶에 무력한 문장들만 쌓여간다
그런데 현장인문학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렇게 묻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이들의 가방끈이 짧은 사정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뭔가를 물을 때 이들은 대체로 자신의 삶을 참조했다. “예전에 내게 이런 일이 있었어요.” 그러다보면 수업은 곧잘 인생 상담으로 흘러갔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예요?” 어떤 재소자는 의사도 아닌 내게 어딘가 아프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앎을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방식도 그랬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앎의 획득이 머리카락을 자르거나 말투를 바꾸는 등 신체나 행동의 변화로 나타나는 일이 많았다.
물론 ‘앎을 참조하는 앎’과 ‘삶을 참조하는 앎’의 구분은 상대적인 것이다. 누구에게나 앎과 삶은 직물을 짜는 씨실과 날실처럼 교차한다. 나처럼 읽고 쓰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도 삶에 대한 참조 없이 읽기와 쓰기가 진행되지는 않는다. 책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삶의 페이지를 되넘기는 일이 무의식적으로 계속 일어난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문장들은 내 삶의 어떤 일들을 격렬히 껴안은 후에야 생기를 얻는다. 그래서 커다란 기쁨으로 마무리될 때조차 읽기와 쓰기는 사람을 지쳐 쓰러지게 만든다. 읽기와 쓰기 모두 겪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해 대학 강의를 하다가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사건을 만났다. 한 학생이 몸이 아파 중간시험을 응시하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 책 한 권을 지정해주고 그 내용을 요약한 뒤 자유롭게 비평해보라는 과제를 냈다. 그가 제출한 독후감은 전체적으로 매끄럽고 깔끔했다. 하지만 정장 입고 놀이공원에 온 사람처럼 어딘가 어색했다. 문장들을 하나씩 살펴보니 문제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직접 인용한 문장들은 책에 있는 정확한 문장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저자 이름을 엉뚱하게 썼다(참고로 책의 저자는 나였다). AI가 작성한 글이었다. 읽지도 않고 쓰지도 않았는데 독후감이 나왔다. 겪지도 않은 일에 대한 보고서였던 셈이다(그가 이용한 거대언어모델 AI도 독자나 저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텍스트를 추출하고 합성했을 뿐이다).
지난달 배재고등학교 야구부 학생들이 ‘5·18민주화운동’을 폄훼하고 조롱하는 응원 구호를 외친 것 때문에 학교 측에서 사과문을 게재했는데 AI로 작성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할 때 겪게 되는 온갖 감정들을 겪지 않은 채 사과문이 나온 셈이다. 사과의 감정과 무관하게 작성된 사과문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오래전 현장인문학이 내게 준 가르침은 앎만을 참조하는 앎을 경계하라는 것이었다. 삶과 무관한 앎은 삶을 참조하고 삶으로 구현할 때의 갈등과 고통을 제거해주지만 그만큼 삶에 무력한 것이다. 그런데 AI 시대의 앎, AI 시대의 읽기와 쓰기는 이런 경향의 끝판왕처럼 보인다. 삶을 참조하는 일은 고사하고, 앎의 생산 과정조차 체험하지 않게 만든다. 읽지도 않은 읽기, 쓰지도 않은 쓰기의 결과물들이 깔끔한 정장을 입고 곳곳에 등장한다.
니체는 “피로 쓴 글만을 사랑한다”며 “글을 쓰려면 피로 쓰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지식, 우리 시대의 문장들에는 피의 공급이 급감하고 있다. 글을 쓸 때 피를 흘리는 사람도, 글을 읽을 때 피 냄새를 맡는 사람도 사라져가고 있다. 피의 공급 없이, 핏물이 다 빠진 문장들을 조합하고 재조합해서 만들어낸 생성형 문장들이 퇴적되고 있을 뿐이다. 피가 끊겼으니 썩을 일만 남은 것일까. 생성이 부패였던가. 삶에 무의미한 문장들이 이제 산더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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