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뀐 것과 바뀌지 않은 것 [플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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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행복한 댓글 0건 조회 16회 작성일 26-02-19 02:26본문
14년이 지났다. 강산이 한 번 반은 바뀌는 동안 한국 대중문화는 표현의 경계를 꾸준히 넓혀왔다. 2021년 엠넷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서 댄스크루 라치카는 퀴어 당사자 댄서들과 함께 ‘본 디스 웨이’ 공연을 펼쳤다. 2023년 MBC <가요대제전>에서는 래퍼 이영지와 그룹 아이브의 안유진이 이 노래를 불렀다. “게이든 이성애자든 양성애자든 레즈비언이든 트랜스젠더든 상관없이, 난 올바른 길을 가고 있어”라는 가사도 삭제되지 않고 흘러나왔다. 2026년에는 그룹 아이들이 ‘커버곡’이 아닌 자신들의 정식 발매곡 ‘모노’에서 퀴어를 직접 호명한다. 이 노래에는 “네가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동쪽에서 왔든 서쪽에서 왔든,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너의 진짜 느낌대로 춤을 춰”라는 가사가 나온다. 영국 출신의 논바이너리(이분법적 성별 구분에 속하지 않는 성정체성) 래퍼 스카이워터의 피처링도 이어진다.
드라마와 예능에서도 동성애는 이제 더 이상 논쟁을 위한 장치나 문제가 있는 존재, 혹은 ‘감초 캐릭터’로만 소비되지 않는다. 2010년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가 동성애자 아들을, 2012년 <응답하라 1997>이 남자 주인공을 짝사랑하는 소년을 등장시켰다면 2024년 <대도시의 사랑법>은 게이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웠다.
퀴어 연애 프로그램 <남의 연애>는 스핀오프를 포함해 5개 시즌이 제작됐다. 금기를 깨는 용감한 아티스트와 제작자가 많아져서만은 아닌 것 같다. 문화는 때로 사회의 감수성을 앞장서서 끌고 가지만 이미 변화한 감수성을 한발 늦게 반영하기도 한다. 대중문화 영역에서 이런 콘텐츠가 늘어나는 것은 이미 대중이 더 이상 게이가 나오는 연애 프로그램도, 동성애가 등장하는 노래도 드라마도 그다지 불편해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뀌지 않은 것도 있다. ‘모노’ 첫 무대가 KBS <뮤직뱅크>에서 송출된 지난달 30일, 국회 앞에서는 개신교 단체 ‘거룩한 방파제 통합 국민대회’ 주최로 차별금지법 폐기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국가의 미래인 청소년들이 불건전한 가치관에 무방비로 노출될 것” “차별금지법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부인하는 전체주의적 사상 통제법” “기도와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들을 ‘정상’으로 복귀시켜야 한다” 등의 주장이 나왔다. 14년 전 잠실주경기장 앞에서 나오던 말들과 너무 비슷해서 기시감이 들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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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야당 국회의원은 집회 참석 후 페이스북에 “특정 독소조항을 담은 차별금지법이 사회적 합의 없이 강행된다면, 우리 사회의 근간이 흔들리고 교육과 가정의 가치가 훼손될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오늘도 유튜브 주간 뮤직비디오 차트 1위에 있는 ‘모노’를 들으며 또 생각한다. 사실 사회적 합의는 이미 이뤄진 지 오래가 아닐까. 이미 체결된 합의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목소리 큰 일부가 우기는 것은 아닐까.
바뀌지 않은 것은 또 있다. 차별금지법은 2012년에도 지금도 여전히 없다. 일하거나 교육받거나 서비스를 받을 때 내 정체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게 핵심인 차별금지법의 반대 포인트가 오로지 ‘동성애’로만 모아지는 현상도 그대로다. “차별금지법은 2007년 이후 여러 차례 발의됐지만 매번 제대로 된 심의 없이 폐기되거나 철회됐다”는 문장을 차별금지법 기사마다 똑같이 쓴 지도 10년 넘게 지났다. 22대 국회에는 진보당 손솔, 조국혁신당 정춘생 의원이 각각 발의한 차별금지법안이 올라와 있다. 이번 국회 임기가 끝날 때는 다른 문장을 쓰고 싶다.
▼ 남지원 젠더데스크 somnia@khan.kr
그래미 어워즈가 지난 1일(현지시간) 열렸다. 1959년 시작해 올해로 68회를 맞은, 말 그대로 세계 최대 음악 시상식이다. ‘그래미’라는 이름의 어원이 궁금한 독자도 있을 것이다. 이 상의 이름은 ‘그라모폰(gramophone)’에서 나왔다. 그라모폰은 1887년 에밀 베를리너가 개발한 역사상 최초의 ‘평평한 원반형 레코드’ 재생장치다. 베를리너는 1898년 음반사도 직접 설립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클래식 음반의 명가가 되는 도이체 그라모폰이다.
올해 그래미의 뜻밖의 주인공은 미국 이민세관집행국(ICE)이었다. 올해의 앨범상을 받은 히스패닉 가수 배드 버니, 올해의 노래 부문 수상자인 빌리 아일리시를 비롯한 여러 뮤지션들이 수상 소감 자리에서 ICE를 향해 직접적인 비판을 쏟아냈다. 물론 미국에서도 논란이 없지는 않았다. 특히 공화당 지지층을 중심으로 “무슨 자격으로 그런 얘기를 하느냐”는 날 선 반응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지루해지는 국내 시상식을 떠올리면 이런 풍경이 부럽기는 하다. 한국의 시상식은 대부분 뻔한 소감투성이에 필요 이상의 겸손으로 가득 차 있다. 이는 시상식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의 풍경이기도 하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바뀌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국내에서는 많은 사람이 ‘골든’과 ‘아파트’의 ‘올해의 노래’ ‘올해의 레코드’ 수상 실패를 아쉬워했다. 여기저기서 인종차별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폭증하기도 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다. 나 역시 해외에서 인종차별 아닌가 싶은 경험을 몇번 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이번 결과를 인종차별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눈에 밟히는 장면도 있다. 예를 들어 배드 버니의 경우 ‘모든 곡을 스페인어로 부른 음반’으로는 최초로 올해의 앨범 부문 상을 수상했다. 히스패닉 뮤지션 중 스페인어가 아닌 영어 음반으로 올해의 앨범 트로피를 처음 거머쥔 주인공은 그 유명한 산타나다. 2000년 42회 그래미에서 명곡 ‘스무드’가 수록된 <수퍼내추럴>로 이 상을 거머쥐었다.
산타나를 비롯한 히스패닉 음악이 미국 시장에 침투한 지는 60년 정도 됐다. 히스패닉 인구는 2025년 기준 미국 전체의 약 20%로 백인 다음 가는 숫자를 자랑한다. ‘미국 내 히스패닉 GDP’만 따로 떼면 세계 5위 경제 대국 수준에 맞먹는다는 분석도 있다.
반면 아시아계의 인구 비중을 살펴보면 8% 정도 수준에 그친다. 이 가운데 한국계는 200만명 안팎으로 추산되는데 아시아계 중 5위에 해당하는 수치다. 인구 규모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어떤 문화가 보편적 감각으로 스며드는 데 발판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K팝이 일궈낸 성취는 위대하지만, 냉정히 말해 미국에서 히스패닉만큼 역사가 오래되었거나 일상적 문화로 자리 잡은 건 아니라고 봐야 한다. 그래미는 미국 로컬 시상식이다.
현재 그래미 투표 위원은 1만5000명 정도다. 특히 올해만 여러 국가의 음악 관계자 3800명을 신규 회원으로 받았는데 40세 미만이 절반 이상, 58%는 유색인종, 35%는 여성에 할당되었다. ‘그래미는 너무 하얗다’는 주장이 과거에는 사실에 가까웠을지라도 이제는 설득력을 잃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희소식도 있다. 2000년대 이후 미국 내 인구가 가장 빠르게 증가한 계층이 바로 아시아계다. 이런 과정을 바탕으로 K팝이 현상을 넘어 일상으로 진입하는 순간 수상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 그날이 언제 올지는 확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날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출근하는 것도 힘든데, 주식까지 공부해야 하나요”라는 문구를 보았다. 출근길의 바로 옆 차로 버스에 붙은 광고였다. 주가가 크게 오르는 사이 주식 계좌 하나 없는 나만 벼락을 맞은 기분, 인공지능(AI) 시대 생산성이 이삼백 프로씩 오른다는데 나만 별다르지 않은 삶을 사는 기분. 그러니 뭐라도 시작은 해야겠어서 유튜브와 교육 플랫폼과 책을 접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하루 종일 너무 열심히 일했다. 에너지가 부족해 머릿속에 무얼 넣을 틈이 없다.
우리는 언제까지 공부해야 할까. “이제 겨우 사십 몇년 살았는데, 주산부터 AI까지 배워야 하는 인생은 너무 버겁다”는 누군가의 자조처럼, 우리는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느라, 뒤처지면 안 된다는 공포에 맞서느라 애쓰고 있다. 그렇게 겨우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고 졸업해 일자리를 찾았지만, 이후 연봉의 인상 폭은 턱없이 작다. 일하며 기르는 능력에 대해선 제대로 보상받고 있지 못하는 듯하다.
공부의 방향과 효용을 둘러싸고 다들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학점 잘 모으고 방학마다 공모전까지 촘촘히 하며 성과를 보태놓은 자신의 역사가, 좀처럼 취업 전선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상황은 당장의 이십대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다. 취업의 어려움은 세대를 거듭해 온 내러티브지만, 이번에는 기술에 의한 대체라는 큰 벽이 서 있다. 어떤 직업군이 어떠한 필요로 존속할지 알 수 없는 혼돈의 시기다. 그러니, 타격감이 이전 세대와는 다를 수 있다.
현직에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열심히 AI를 배우는데, 이것이 미래의 적을 만드는 것인지 나의 도구를 키우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심지어 지금 배우는 프롬프트 기술이 내년에도 효용이 있을지 모르겠다. 누구도 답을 알지 못한다. 시대가 강조하는 대로 조금이라도 주도적으로 살아보려는 각각의 고군분투에, 상처가 덧대진다.
일의 미래에 대해서든, 공부의 현재를 다루든, 우리는 우리 사회가 지닌 특수한 감수성 안에서 이 현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바심이 나는 그 마음들과, 체력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버겁게 돌아가는 현실들이 맞부딪히는 상황을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저 재교육 프로그램, AI 리터러시 훈련 과정만 흩뿌리는 것은 효용이 낮을 수밖에 없다. 배우는 것 자체도 벅차고, 배운 뒤에도 오래 써 먹을 기술이라는 믿음이 없다. 개인들에게는 지금 내가 가진 역량을 더 돋보이게 만들어줄, 그래서 훅 떨어진 자존감을 실질적으로 올려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걸 레버리지하는 기술이나 훈련이 AI일 수도 있고, 아니면 마케팅 강의일 수도 있다.
그러니 일단 해야 할 건, 다시금 내가 가진 능력을 뾰족하게 정의 내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꼭 일터의 역량만이 능력이라 하진 말자. 친구들 사이에서 이야기를 주도하는 능력, 상대의 미묘하게 바뀐 스타일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능력, 어느 만화 속 등장인물의 에피소드에 푹 빠져 살 수 있는 능력, 페트병에 입 안 대고 한 방울의 흘림 없이 물을 마시는 능력 등 일상 속 개인기에도 기회가 있을 수 있다. 이번 설에는 우리 시간을 좀 가지고 서로의 능력을 찾아주는 게 어떨까. 그러고는 우리, 자부심을 가지자고 한마디씩 나누는 건 어떨까. 예전에 직접 경험해 봤는데, 효과가 상당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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