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우리 안의 허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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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행복한 댓글 0건 조회 1회 작성일 26-07-23 17:26본문
국문과 교수인 허문오는 강의실 맨 끝줄에 앉은 학생 이강의 글에서 재능을 발견하고 그의 글에 빠져든다. 이강이 친구 집에서 벌어지는 일을 소재로 써내려가는 이야기는 흥미로운데, 그것이 실제인지 허구인지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허문오는 그 모호함 속에서 자신이 믿고 싶은 버전을 골라 믿는다.
넷플릭스 시리즈 <맨 끝줄 소년>에 등장하는 허문오가 이강의 글에 빠져든 과정을 보면 그는 단 한 번도 ‘이것이 사실인가’ 의심하지 않는다. 그 이야기가 작가로서의 열패감, 라이벌에 대한 오랜 질투심을 해소해주기에 계속 읽고, 믿는다. 그는 특별히 어리석거나 유별난 사람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이야기를 갈망했고, 그 갈망이 결국 판단력을 마비시켜 삶을 무너뜨린다.
이는 평생 텍스트를 읽고 진위를 가리는 훈련을 해온 전문가조차 욕망 앞에서는 비평가의 눈을 닫아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확증편향이 무지의 문제가 아닌 욕망의 문제라는 뜻이다. 이를 사회 전체의 구조적 현상과 등치시키는 것은 성급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밑바닥에 흐르는 메커니즘은 오늘날 공론장에서도 비슷하게 작동한다.
‘맨 끝줄 소년’으로 본 확증편향무지의 문제가 아닌 욕망의 문제검증은 ‘결론 정당화 수단’ 전락할 얘기 없으면 차라리 입을 닫자
유튜브 앱을 열면 자기 주장만 옳다고 목청 높이는 이들이 넘쳐난다. 진영과 이해관계에 따라 같은 사건, 같은 발언이 정반대로 해석되고 비틀어진다. 그런 주장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알고리즘이 안내하는 대로 자신의 믿음을 강화하는 사람들도 많다. 물론 여기서 개인의 심리적 습관과 플랫폼 구조의 문제를 구분해서 볼 필요는 있다. 허문오의 믿음이 순전히 개인적 갈망에서 비롯됐다면, 오늘날의 확증편향은 유튜브 알고리즘과 커뮤니티 게시판이 각자의 성향을 정교하게 학습해 맞춤형 서사를 끊임없이 공급하는, 훨씬 더 구조적이고 산업화된 현상이다. 개인의 인지적 약점이 플랫폼 경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강화되고 수익화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개인이 정치인이나 언론처럼 여론 형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고, 알고리즘의 편향성을 특정 진영이나 개인을 위해 적극적으로 이용하려 한다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사회 전체를 병들게 할 수 있어서다.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을 보자. 법원은 여러 차례 선거무효 소송을 진행했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시스템에 대한 감사와 수사도 이어졌지만, 전국 단위 선거 결과가 조작됐다는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일부 정치인과 유튜버들은 관리 부실이나 절차상 문제를 부정선거의 증거로 확대 해석한다. 이는 윤어게인, 극우 등 특정 세력 맞춤용 주장이란 걸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알고리즘에 올라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믿고 퍼뜨린다.
걸그룹 멤버의 발언을 둘러싸고 특정 온라인 커뮤니티식 표현 아니냐는 문제 제기가 나오자, 특유의 자의식으로 충만한 유명 정치인은 SNS에 지역과 표현 방식을 임의로 구분 짓는 기준을 제시하며 극우 몰이에 뛰어들었다. 언어학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뚜렷한 근거가 있다고 보기 어려운 구분이고, 같은 진영에서조차 “바보 같은 짓”이란 반응이 나오는데도 무리수를 두며 믿고 싶은 서사를 써내려간다. 검찰의 수사·기소 완전 분리를 둘러싼 강경파들의 주장도 본질적으로 똑같다. 검찰의 보완수사권 유지는 검찰 개혁 반대라는 도식을 정해놓고 이념 전쟁식으로 몰아가는 그들로 인해 알고리즘은 또 한번 갈등과 분열의 시나리오를 대량 생산하고 있다.
이 같은 논리 전개에서 검증은 결론을 내리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이미 내린 결론을 정당화하는 절차로 뒤바뀐다. 허문오는 진실을 확인하는 대신 다음 이야기를 갈구했고, 그 갈망은 그를 범죄로까지 몰아넣었다. “할 얘기가 없으면 그냥 안 해도 되지 않나.” 허문오의 라이벌이 그에게 던진 말은 현실의 공론장에도 유효하다. 경찰의 수사권 독점에 대한 우려를 반개혁으로, 경상도 사투리와 구분하기 어려운 종결어미를 극우의 말투로, 선거관리위원회의 허접한 일처리를 부정선거로 몰아가기 전에 한 번쯤 스스로를 의심해볼 순 없나. 자신의 편향된 세계관과 발언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칠 수 있는지 생각하면서 한 번쯤은 입을 다물자.
22일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강한 비가 내리면서 경기 안성과 평택에 산사태 특보가 발령됐다.
안성시와 평택시는 22일 오전 6시를 전후해 산사태 특보를 발령하고 산림 주변 위험지역 접근을 금지할 것을 당부했다. 안성시에는 산사태 경보가, 평택시에는 산사태 주의보가 각각 내려졌다.
이날 오전 7시 기준 안성시는 149.5㎜, 평택시는 175.5㎜의 누적 강수량을 기록했다. 안성시의 경우 이날 오전 2시 28분부터 3시 28분까지 시간당 56.0㎜의 비가 내렸다.
최근 강의에서 내가 “우익 시민사회”라는 단어를 사용하자, 한 청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시민사회라는 말은 진보적인 경우에만 쓰는 거 아닌가요?” 나는 이 질문이 나를 포함, 지금 한국 사회를 사는 많은 이들의 혼란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표현의 자유’도 마찬가지다. 오랜 군사 정권 시절이나 보수 정권이 집권할 때 시민들이 저항의 구호로 사용했던 “표현·집회·출판의 자유”가 이제는 다른 입장을 가진 이들에 의해 열렬히 주장되고 있다. 더구나 이들의 활동은 예전의 비판적 시민사회 못지않게 지속적이고 헌신적이다. 이들은 보수 정권에서는 “관변단체”로 간주되었지만 민주당 정권에서는 저항 세력이다. 물론 우익과 보수의 스펙트럼은 넓고 다양하다. 문제는 이들 중 기존 보수 세력보다 더 나라를 사랑하는 이들이 있고, 이들을 활용하는 정치인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저항이나 자유는 무조건 긍정적인 가치가 아니다. “~에 대한 저항인가” “~으로부터의 자유인가”라는 질문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는 이런 질문 없이, 누가 주장하든 그 주장의 내용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똑같이 사용되고 있다. 동음(同音)만 반복될 뿐 발화자의 위치성은 좀처럼 문제시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수강생의 질문에는, 그들은 시민이 아니고 그들을 시민사회라고 부를 수 없다는 전제가 있다. 사실 지금 한국의 보수 세력은 숭미, 혐중 외에는 입장이 없다. 음모론과 반대를 위한 반대가 그들의 입장이다. 지난 6월 서울시교육감 선거에서, 당선되지는 않았지만 보수의 대표를 자처하며 2위를 차지한 조전혁 후보의 플래카드에 적힌 문구는 충격적이기보다 의아했다. 거리마다 나부낀 현수막에는 한결같이 “퀴어 동성애 교육 추방”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나는 혐오 발화 여부를 ‘떠나’ 과연 이 구호를 정확히 이해하는 시민이 얼마나 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선거용 구호는 쉽고 정확해야 한다. 그의 선거운동 세력이 이를 몰랐을 리 없다. 다만 “진보 진영이 동성애자의 인권을 지지할 것”이라는 짐작에서 그들은 자신들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혐오 표현을 사용한 듯하다.
표현의 자유는 약자의 권리일 때만
영어에서 자유는 ‘freedom’과 ‘liberation’으로 구별한다. 전자는 자유로움이고 후자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 표현의 자유는 ‘freedom of speech’로 해방의 의미가 없다. 나는 표현의 자유가 일종의 희언이라고 생각한다. 무의미한 말이라는 의미다. 언어 행위 자체의 특성상, 표현의 자유는 불가능한 실천이다. 표현의 자유는 자유주의에 기반한 근대의 보편적 인권 개념의 핵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말의 세계에는 중립이 없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당파성을 가진다. 이것이 표현의 자유 패러다임의 근본적 모순이다. 즉 가부장제 사회나 자본주의의 통치 이데올로기에 익숙한 사람의 표현의 자유는, 피억압자나 역사적 고통의 경험자에게 폭력으로 작동하기 쉽다.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이주노동자를 비하하는 말, 4·3이나 5·18 피해자를 상대로 한 표현은 언제나 신중해야 하고 ‘자유로움’의 틀에서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
자기 의견을 마음대로 표현하는 행위? 이는 표현의 자유가 근본적으로 내재한 모순이다. 자기만의 언어가 없거나 발언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에게 표현의 자유는 주어진 권리가 아니라 평생 노력해서 획득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이들에게 표현의 ‘자유’는 사명이자 의무이다.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자나 장애인이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가. 여성이라고 해서 모두 여성주의자가 되는가. 피억압자에게 표현의 자유는 투쟁해야만 얻을 수 있는 가치다.
결국 표현의 자유는 강자와 약자 모두에게 소용이 없다. 강자의 표현의 자유는 약자에게 폭력이고, 약자의 표현의 자유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이때 강자와 약자의 구분은 자기 삶의 경험이 기존의 언어와 일치하는가(강자), 그러지 않는가(약자)로 한다. 강자는 표현의 자유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맘껏 누리기만 하면 될 뿐이다.
스타벅스 사태나 서울 배재고 일부 학생들의 행위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앞으로도 비슷한 사건이 반복될 것이다. 보편적 인권 개념을 전유하려는 극우 세력의 입장에서는 “내가 하는 말은 혐오 발화고, 네가 하는 말은 표현의 자유냐?”라고 항변할 수 있다.
더구나 당대는 SNS라는 혐오 행위의 사회적 인프라가 완벽하게 마련된 상태다. 온라인의 익명성과 집단성은 ‘평균적 혐오’를 넘어서 창의력이 더해진다. 표현의 자유는 무한히 팽창하고 제재 없이 오용되고 있다. 더구나 많은 경우 표현의 자유는 약자가 약자를 혐오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잘사는 사람들’이 서울의 올림픽공원에 몇날 며칠씩 모여 있을 수 있을까. 아니, 그럴 필요가 있을까.
누가 ‘약자’인가라는 논쟁
표현의 자유는 약자의 권리일 때만 의미가 있다. 문제는 사람마다 누가 약자인가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여성 우위, 남성 차별 시대”라는 주장이다. 더구나 신자유주의 통치 체제는 약자 코스프레가 생존의 기술이 되거나 가장 약한 사람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시스템이다.
미국의 에코 페미니스트 그레타 가드는 자신의 책 <비판적 에코페미니즘>에서 억압자(주체)가 피억압자(타자)를 인식하는 방식을 다섯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 주인이 타자의 봉사를 이용하면서도 자신의 의존성을 부인하는 후경화(backgrounding), 둘째, 주인이 타자와의 차이를 극대화하고, 반대로 공통점을 극소화하는 과잉분리(hyperseparation) 단계, 셋째, 주인의 특성이 표준이 되어 타자를 측정하는 병합(incorporation) 단계, 넷째, 타자가 주인에게 봉사하는 것 외에는 존재 목적이 없도록 형성되는 도구주의(instrumentalism) 단계, 끝으로 지배받는 타자가 아무 차이 없이 단일한 존재인 것처럼 보이게 되는 고정관념화(stereotyping) 단계가 그것이다.
<사기(史記)>의 사마천에게, 말은 언제나 목숨을 내놓는 일이었다. 표현의 자유는 표현의 책임이나 임무에 준하는 대단한 각오가 필요한 일이다. “장난이었어요” “농담도 못하나?” 같은 말은 난센스다. 표현의 자유는 어려운 실천이고 그래야 한다.
스타벅스의 5·18 광주 사태 “탱크데이” 기념 캠페인, 이러한 기업의 행위를 따라 하는 일부 고등학생들의 야구 경기 응원… 스타벅스의 잘못에 대한 시민들의 항의를 야당 당대표가 “커피 한 잔의 자유”를 달라며 조롱하는 상황… 소통은 어렵고 사회적 갈등은 반복된다.
그러나 나는 혐오 발화가 발생할 때마다 국가가 개입하거나 법적 처벌을 가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해자들은 반성하기보다 반발한다. 그래서 가해자다. 그리고 이들을 대변하는 공적인 정치 세력이 버젓이 존재한다. 이런 상황을 막을 대안은 없다.
이 문제와 관련해 우리가 간과하는 사실이 있다. 나는 이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극우가 격정적이라면 가해자는 대개 극도로 분노 상태에 있다. 이는 개인의 문제를 넘어선다. 기본적으로는 그들은 자신의 가해 행위가 사회적으로 용인, 지지를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여성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women) 가해자들과 상담한 적이 있는데, 특히 성폭력의 경우 가해자들의 핵심적인 인식은 분노이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남들 다 하는데 나만 걸렸다” “‘꽃뱀’에게 걸렸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물론 경찰 조서를 보면 명백한 거짓말이다. 치명적인 물리적 폭력을 동반한 성폭력인 경우에도 이렇게 말한다. 아내에게 폭력을 가하는 남편들의 고뇌(?)도 비슷하다. 이들은 가정폭력방지법이 “아내를 교육시키고 가정을 바로잡을 기회를 박탈하는 가정파괴법”이라고 호소한다.
이러한 생각들은 우리 사회의 일상을 구성한다. 혐오 발화를 행하는 가해자는 당당하고 심지어 가해자의 “기를 죽이면 안 된다”는 사회의 걱정이 동반되지만, 피해자는 용서하기를 강요받으며 고립된다. 내가 사는 서울 변두리의 스타벅스 매장은 여전히 사람들로 붐빈다.
넷플릭스 시리즈 <맨 끝줄 소년>에 등장하는 허문오가 이강의 글에 빠져든 과정을 보면 그는 단 한 번도 ‘이것이 사실인가’ 의심하지 않는다. 그 이야기가 작가로서의 열패감, 라이벌에 대한 오랜 질투심을 해소해주기에 계속 읽고, 믿는다. 그는 특별히 어리석거나 유별난 사람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이야기를 갈망했고, 그 갈망이 결국 판단력을 마비시켜 삶을 무너뜨린다.
이는 평생 텍스트를 읽고 진위를 가리는 훈련을 해온 전문가조차 욕망 앞에서는 비평가의 눈을 닫아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확증편향이 무지의 문제가 아닌 욕망의 문제라는 뜻이다. 이를 사회 전체의 구조적 현상과 등치시키는 것은 성급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밑바닥에 흐르는 메커니즘은 오늘날 공론장에서도 비슷하게 작동한다.
‘맨 끝줄 소년’으로 본 확증편향무지의 문제가 아닌 욕망의 문제검증은 ‘결론 정당화 수단’ 전락할 얘기 없으면 차라리 입을 닫자
유튜브 앱을 열면 자기 주장만 옳다고 목청 높이는 이들이 넘쳐난다. 진영과 이해관계에 따라 같은 사건, 같은 발언이 정반대로 해석되고 비틀어진다. 그런 주장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알고리즘이 안내하는 대로 자신의 믿음을 강화하는 사람들도 많다. 물론 여기서 개인의 심리적 습관과 플랫폼 구조의 문제를 구분해서 볼 필요는 있다. 허문오의 믿음이 순전히 개인적 갈망에서 비롯됐다면, 오늘날의 확증편향은 유튜브 알고리즘과 커뮤니티 게시판이 각자의 성향을 정교하게 학습해 맞춤형 서사를 끊임없이 공급하는, 훨씬 더 구조적이고 산업화된 현상이다. 개인의 인지적 약점이 플랫폼 경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강화되고 수익화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개인이 정치인이나 언론처럼 여론 형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고, 알고리즘의 편향성을 특정 진영이나 개인을 위해 적극적으로 이용하려 한다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사회 전체를 병들게 할 수 있어서다.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을 보자. 법원은 여러 차례 선거무효 소송을 진행했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시스템에 대한 감사와 수사도 이어졌지만, 전국 단위 선거 결과가 조작됐다는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일부 정치인과 유튜버들은 관리 부실이나 절차상 문제를 부정선거의 증거로 확대 해석한다. 이는 윤어게인, 극우 등 특정 세력 맞춤용 주장이란 걸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알고리즘에 올라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믿고 퍼뜨린다.
걸그룹 멤버의 발언을 둘러싸고 특정 온라인 커뮤니티식 표현 아니냐는 문제 제기가 나오자, 특유의 자의식으로 충만한 유명 정치인은 SNS에 지역과 표현 방식을 임의로 구분 짓는 기준을 제시하며 극우 몰이에 뛰어들었다. 언어학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뚜렷한 근거가 있다고 보기 어려운 구분이고, 같은 진영에서조차 “바보 같은 짓”이란 반응이 나오는데도 무리수를 두며 믿고 싶은 서사를 써내려간다. 검찰의 수사·기소 완전 분리를 둘러싼 강경파들의 주장도 본질적으로 똑같다. 검찰의 보완수사권 유지는 검찰 개혁 반대라는 도식을 정해놓고 이념 전쟁식으로 몰아가는 그들로 인해 알고리즘은 또 한번 갈등과 분열의 시나리오를 대량 생산하고 있다.
이 같은 논리 전개에서 검증은 결론을 내리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이미 내린 결론을 정당화하는 절차로 뒤바뀐다. 허문오는 진실을 확인하는 대신 다음 이야기를 갈구했고, 그 갈망은 그를 범죄로까지 몰아넣었다. “할 얘기가 없으면 그냥 안 해도 되지 않나.” 허문오의 라이벌이 그에게 던진 말은 현실의 공론장에도 유효하다. 경찰의 수사권 독점에 대한 우려를 반개혁으로, 경상도 사투리와 구분하기 어려운 종결어미를 극우의 말투로, 선거관리위원회의 허접한 일처리를 부정선거로 몰아가기 전에 한 번쯤 스스로를 의심해볼 순 없나. 자신의 편향된 세계관과 발언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칠 수 있는지 생각하면서 한 번쯤은 입을 다물자.
22일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강한 비가 내리면서 경기 안성과 평택에 산사태 특보가 발령됐다.
안성시와 평택시는 22일 오전 6시를 전후해 산사태 특보를 발령하고 산림 주변 위험지역 접근을 금지할 것을 당부했다. 안성시에는 산사태 경보가, 평택시에는 산사태 주의보가 각각 내려졌다.
이날 오전 7시 기준 안성시는 149.5㎜, 평택시는 175.5㎜의 누적 강수량을 기록했다. 안성시의 경우 이날 오전 2시 28분부터 3시 28분까지 시간당 56.0㎜의 비가 내렸다.
최근 강의에서 내가 “우익 시민사회”라는 단어를 사용하자, 한 청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시민사회라는 말은 진보적인 경우에만 쓰는 거 아닌가요?” 나는 이 질문이 나를 포함, 지금 한국 사회를 사는 많은 이들의 혼란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표현의 자유’도 마찬가지다. 오랜 군사 정권 시절이나 보수 정권이 집권할 때 시민들이 저항의 구호로 사용했던 “표현·집회·출판의 자유”가 이제는 다른 입장을 가진 이들에 의해 열렬히 주장되고 있다. 더구나 이들의 활동은 예전의 비판적 시민사회 못지않게 지속적이고 헌신적이다. 이들은 보수 정권에서는 “관변단체”로 간주되었지만 민주당 정권에서는 저항 세력이다. 물론 우익과 보수의 스펙트럼은 넓고 다양하다. 문제는 이들 중 기존 보수 세력보다 더 나라를 사랑하는 이들이 있고, 이들을 활용하는 정치인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저항이나 자유는 무조건 긍정적인 가치가 아니다. “~에 대한 저항인가” “~으로부터의 자유인가”라는 질문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는 이런 질문 없이, 누가 주장하든 그 주장의 내용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똑같이 사용되고 있다. 동음(同音)만 반복될 뿐 발화자의 위치성은 좀처럼 문제시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수강생의 질문에는, 그들은 시민이 아니고 그들을 시민사회라고 부를 수 없다는 전제가 있다. 사실 지금 한국의 보수 세력은 숭미, 혐중 외에는 입장이 없다. 음모론과 반대를 위한 반대가 그들의 입장이다. 지난 6월 서울시교육감 선거에서, 당선되지는 않았지만 보수의 대표를 자처하며 2위를 차지한 조전혁 후보의 플래카드에 적힌 문구는 충격적이기보다 의아했다. 거리마다 나부낀 현수막에는 한결같이 “퀴어 동성애 교육 추방”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나는 혐오 발화 여부를 ‘떠나’ 과연 이 구호를 정확히 이해하는 시민이 얼마나 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선거용 구호는 쉽고 정확해야 한다. 그의 선거운동 세력이 이를 몰랐을 리 없다. 다만 “진보 진영이 동성애자의 인권을 지지할 것”이라는 짐작에서 그들은 자신들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혐오 표현을 사용한 듯하다.
표현의 자유는 약자의 권리일 때만
영어에서 자유는 ‘freedom’과 ‘liberation’으로 구별한다. 전자는 자유로움이고 후자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 표현의 자유는 ‘freedom of speech’로 해방의 의미가 없다. 나는 표현의 자유가 일종의 희언이라고 생각한다. 무의미한 말이라는 의미다. 언어 행위 자체의 특성상, 표현의 자유는 불가능한 실천이다. 표현의 자유는 자유주의에 기반한 근대의 보편적 인권 개념의 핵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말의 세계에는 중립이 없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당파성을 가진다. 이것이 표현의 자유 패러다임의 근본적 모순이다. 즉 가부장제 사회나 자본주의의 통치 이데올로기에 익숙한 사람의 표현의 자유는, 피억압자나 역사적 고통의 경험자에게 폭력으로 작동하기 쉽다.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이주노동자를 비하하는 말, 4·3이나 5·18 피해자를 상대로 한 표현은 언제나 신중해야 하고 ‘자유로움’의 틀에서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
자기 의견을 마음대로 표현하는 행위? 이는 표현의 자유가 근본적으로 내재한 모순이다. 자기만의 언어가 없거나 발언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에게 표현의 자유는 주어진 권리가 아니라 평생 노력해서 획득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이들에게 표현의 ‘자유’는 사명이자 의무이다.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자나 장애인이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가. 여성이라고 해서 모두 여성주의자가 되는가. 피억압자에게 표현의 자유는 투쟁해야만 얻을 수 있는 가치다.
결국 표현의 자유는 강자와 약자 모두에게 소용이 없다. 강자의 표현의 자유는 약자에게 폭력이고, 약자의 표현의 자유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이때 강자와 약자의 구분은 자기 삶의 경험이 기존의 언어와 일치하는가(강자), 그러지 않는가(약자)로 한다. 강자는 표현의 자유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맘껏 누리기만 하면 될 뿐이다.
스타벅스 사태나 서울 배재고 일부 학생들의 행위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앞으로도 비슷한 사건이 반복될 것이다. 보편적 인권 개념을 전유하려는 극우 세력의 입장에서는 “내가 하는 말은 혐오 발화고, 네가 하는 말은 표현의 자유냐?”라고 항변할 수 있다.
더구나 당대는 SNS라는 혐오 행위의 사회적 인프라가 완벽하게 마련된 상태다. 온라인의 익명성과 집단성은 ‘평균적 혐오’를 넘어서 창의력이 더해진다. 표현의 자유는 무한히 팽창하고 제재 없이 오용되고 있다. 더구나 많은 경우 표현의 자유는 약자가 약자를 혐오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잘사는 사람들’이 서울의 올림픽공원에 몇날 며칠씩 모여 있을 수 있을까. 아니, 그럴 필요가 있을까.
누가 ‘약자’인가라는 논쟁
표현의 자유는 약자의 권리일 때만 의미가 있다. 문제는 사람마다 누가 약자인가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여성 우위, 남성 차별 시대”라는 주장이다. 더구나 신자유주의 통치 체제는 약자 코스프레가 생존의 기술이 되거나 가장 약한 사람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시스템이다.
미국의 에코 페미니스트 그레타 가드는 자신의 책 <비판적 에코페미니즘>에서 억압자(주체)가 피억압자(타자)를 인식하는 방식을 다섯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 주인이 타자의 봉사를 이용하면서도 자신의 의존성을 부인하는 후경화(backgrounding), 둘째, 주인이 타자와의 차이를 극대화하고, 반대로 공통점을 극소화하는 과잉분리(hyperseparation) 단계, 셋째, 주인의 특성이 표준이 되어 타자를 측정하는 병합(incorporation) 단계, 넷째, 타자가 주인에게 봉사하는 것 외에는 존재 목적이 없도록 형성되는 도구주의(instrumentalism) 단계, 끝으로 지배받는 타자가 아무 차이 없이 단일한 존재인 것처럼 보이게 되는 고정관념화(stereotyping) 단계가 그것이다.
<사기(史記)>의 사마천에게, 말은 언제나 목숨을 내놓는 일이었다. 표현의 자유는 표현의 책임이나 임무에 준하는 대단한 각오가 필요한 일이다. “장난이었어요” “농담도 못하나?” 같은 말은 난센스다. 표현의 자유는 어려운 실천이고 그래야 한다.
스타벅스의 5·18 광주 사태 “탱크데이” 기념 캠페인, 이러한 기업의 행위를 따라 하는 일부 고등학생들의 야구 경기 응원… 스타벅스의 잘못에 대한 시민들의 항의를 야당 당대표가 “커피 한 잔의 자유”를 달라며 조롱하는 상황… 소통은 어렵고 사회적 갈등은 반복된다.
그러나 나는 혐오 발화가 발생할 때마다 국가가 개입하거나 법적 처벌을 가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또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해자들은 반성하기보다 반발한다. 그래서 가해자다. 그리고 이들을 대변하는 공적인 정치 세력이 버젓이 존재한다. 이런 상황을 막을 대안은 없다.
이 문제와 관련해 우리가 간과하는 사실이 있다. 나는 이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극우가 격정적이라면 가해자는 대개 극도로 분노 상태에 있다. 이는 개인의 문제를 넘어선다. 기본적으로는 그들은 자신의 가해 행위가 사회적으로 용인, 지지를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나는 여성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women) 가해자들과 상담한 적이 있는데, 특히 성폭력의 경우 가해자들의 핵심적인 인식은 분노이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남들 다 하는데 나만 걸렸다” “‘꽃뱀’에게 걸렸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물론 경찰 조서를 보면 명백한 거짓말이다. 치명적인 물리적 폭력을 동반한 성폭력인 경우에도 이렇게 말한다. 아내에게 폭력을 가하는 남편들의 고뇌(?)도 비슷하다. 이들은 가정폭력방지법이 “아내를 교육시키고 가정을 바로잡을 기회를 박탈하는 가정파괴법”이라고 호소한다.
이러한 생각들은 우리 사회의 일상을 구성한다. 혐오 발화를 행하는 가해자는 당당하고 심지어 가해자의 “기를 죽이면 안 된다”는 사회의 걱정이 동반되지만, 피해자는 용서하기를 강요받으며 고립된다. 내가 사는 서울 변두리의 스타벅스 매장은 여전히 사람들로 붐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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